지난달 24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한국산 부식방지 처리 강판(CORE) 제품이 덤핑 수입되고, 정부 보조금을 받은 탓에 미국 산업에 피해가 있었다”는 최종 판정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국산 CORE 제품은 업체에 따라 8.75~47.80%의 반(反)덤핑 관세, 0.72~1.19%의 상계 관세가 부과될 예정이다. CORE는 아연·알루미늄으로 코팅해 쉽게 부식되지 않도록 만든 철강 제품으로, 자동차·가전제품 등에 쓰인다.
미국이 진행 중인 한국산 철강 수입 규제는 이뿐이 아니다. ITC는 다음 달 냉연강판과 강벽사각파이프, 12월 인동(구리모합금), 내년 4월엔 철강 후판에 대해 산업 피해를 최종 판정할 계획이다.
10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으로 대(對)한국 수입규제 184건 중 철강·금속 제품은 90건으로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무역보호주의 확산에 있어서 이토록 ‘철강’이 집중 포화를 맞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선 근본 원인은 글로벌 철강 생산설비 과잉에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철강 생산 초과량은 약 7억 t에 이르며 그 중 4억 3000만 t이 중국산이다. 철강은 ‘산업의 쌀’이라 불릴 만큼 자동차·조선·기계 등 제조업의 근간이다. 과잉 생산이 문제임에도 각 국이 철강에 대해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다.
한국산 철강·금속 제품 수입규제가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19건)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 정치권이 철강 업계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비슷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2002년 2월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철강업계의 요구에 따라 철강 제품에 대한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발동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듬해 세계무역기구(WTO)로부터 수입제한조치가 부당하다는 판정을 받아 철회했다. 경쟁력 약화를 규제로 맞섰던 것이다. 그런데도 당시 미국 철강업계는 세이프가드를 유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을 연이어 압박했다.
최남석 전북대 무역학과 교수는 “현재도 미국 정치권이 ‘자국 산업을 보호해 고용 늘려야 한다’는 유권자 의견을 무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선거를 앞두고 철강 노동자가 많은 펜실베니아, 오하이오주 등의 표심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철강업계가 정치권에 강한 입김을 불다보니 수입이 필요함에도 규제가 들어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 적도 있다. 제현정 한국무역협회 연구위원은 “북미 셰일가스 개발 붐으로 유정용 강관의 수요가 늘면서 미국이 중국, 한국 등에서 수입을 많이 했는데 2014년 반덤핑 관세를 부과 받았다”며 “미국 내 공급이 적었음에도 철강 업계의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선제적 구조조정을 통해 앞으로 벌어질 리스크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철강은 자본집약적 산업이라 시황에 1~2년 만에 대응할 수 없다”며 “앞으로 수요가 높아질 철강 제품을 예측하고, 생산 재원을 미리 옮기는 선제적인 투자와 사업 재편으로 수입 규제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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