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한국 극장가는 관객 가뭄에 시달렸다. 2014년 세월호 참사나 지난해 메르스 사태 같은 악재가 없었는데도 올해 5월까지 누적 관객 수는 약 7700만 명으로 2012년 이후 처음으로 8000만 명을 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극장가의 ‘불황’이 고착화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내놓는다. 실제 연간 영화 관객 수는 2013년 2억 명을 돌파한 이후 매년 증가했지만 성장률은 1%대에 그쳤다.
동아일보는 위기론과 관련해 최근 일반 관객(300명) 설문조사와 영화 전문가 20명에 대한 심층 인터뷰를 했다. 영화 전문가들은 비관적인 전망이 약간 많았으나 관객들은 여전히 한국 영화의 힘을 믿고 있었다. 전문가 20명 중 11명이 ‘한국 영화산업이 정체기에 다다랐다고 보느냐’란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일반 관객 70.3%는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의 질이 높아졌다고 보느냐’란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이처럼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이 살아 있을 때 소재와 형식의 다양화, 스토리텔링 강화 등 새로운 흥행 요소를 통해 질적 향상을 이뤄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검은 사제들’ ‘곡성’ 등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내수 시장의 정체와 위기론의 실체
위기론의 근저에는 내수 시장이 사실상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는 점이 깔려 있다. 지난해 기준 관객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는 4.2회로 홍콩(3.9회) 북미(3.8회) 프랑스(3.1회)를 앞지르고 있다. 5000만 명이 약간 넘는 인구와 고령화 속도를 고려할 때 더 이상의 증가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한국 영화가 질적으로 성장했느냐고요? 일부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대기업 위주의 수직계열화로 인한 스크린 독과점이 전체 영화의 질은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과열 경쟁 구조가 굳어지면서 ‘고비용 저효율’ 영화가 늘어났어요. 이는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실망감으로 이어지기 쉽죠.”
한 영화 제작자의 푸념이 아니더라도 한국 영화는 확실히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다. 심층 인터뷰한 전문가 20명 중 11명이 한국 영화산업이 정체기라고 응답한 것은 현장에서 위기 가능성을 피부로 느낀다는 의미다. 한 중견 제작자는 “가상현실(VR) 등의 새로운 기술이 접목된 관람 형태가 붐을 일으키지 않는 한 정체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체기가 아니라고 본 전문가 9명도 “양적 성장은 둔화되더라도 질적 성장과 해외 진출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점을 근거로 삼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내수 시장의 양적 성장에 대해서는 전문가 대부분이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흥행에 유리하다며 중장년층을 겨냥한 작품들 위주로 라인업을 짜는 추세도 ‘양날의 칼’이란 지적이 있다. 몇 년간 ‘명량’ ‘국제시장’ ‘연평해전’ 등이 비교적 영화관 발걸음이 뜸하던 40, 50대 이상 관객을 불러 모은 것은 가시적인 성과다. 하지만 엇비슷한 소재나 주제가 반복돼 오히려 전체 관객의 실망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영화 제작자 A 씨는 “한국 시장 규모로 볼 때 1000만 영화는 중년층 이상의 관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대작 영화의 달콤한 열매에 취해 30억∼50억 원 규모의 ‘허리급’ 영화들이 설 자리를 잃는 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다양성-스토리텔링 강화가 새 흥행 법칙
위기론은 사실 영화 시장이 고도 성장기를 마치고 성숙한 시장이 되면서 나온 것이다. 양적으로는 이전과 같은 호황을 누리기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는 분명 위기다. 하지만 연간 2억 명의 관객을 확보한 현 상황에서 질적 성장의 여지는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한 투자배급사 관계자도 “지금 같은 시장 상황에서 외형적 규모를 늘리는 데 치중해 질적 성장을 도외시하면 자충수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 20명은 다양성과 스토리텔링의 강화, 해외 진출 등 ‘새로운 흥행 법칙’을 세워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한국 영화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를 묻는 질문에는 8명(40%)이 ‘신인 감독 및 제작자 등 새로운 창작자 발굴’을 꼽았다. 영화 홍보사 퍼스트룩의 이윤정 대표는 “할리우드처럼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와 예산 안에서 짜임새 있는 스토리텔링을 강화해온 것이 지금까지 한국 영화의 성공 비결”이라며 “새롭고 참신한 소재와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신인 감독 및 제작자, 프로듀서의 발굴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 가운데 30%는 ‘해외 진출을 통한 새로운 시장 확대’를 주요 과제로 언급하기도 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중국 영화 산업과의 공조가 국내 영화 산업의 성장에도 플러스 요소로 작용하리라 본다”며 “다소 부침이 있더라도 2억 명 관객 시대가 당분간 지속되면 이런 시장의 수요를 이끌어낼 경쟁력을 갖춘 영화들도 꾸준히 등장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검은 사제들’ ‘곡성’… 새 시도가 관객을 유인
지난해 11월 개봉한 ‘검은 사제들’은 다양성과 스토리텔링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악귀를 쫓는 구마(驅魔) 의식을 소재로 한 오컬트(초자연현상) 장르는 해외 영화에선 익숙한 소재지만 국내 작품에선 거의 다뤄진 적이 없다. 한국 영화 팬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강했기 때문이다. 장재현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으로 극장 비수기에 개봉했으나 약 544만 명이 관람하며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 성적을 거뒀다. 한 영화평론가는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넘긴 영화 ‘암살’은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데다 사실상 여성 배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기존 충무로 흥행 공식에서는 ‘필패’로 예측됐다”며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징크스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우리 관객들이 영화 관계자들보다 관습이나 터부에서 훨씬 자유롭다”고 밝혔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상반기(1∼6월) 한국 영화의 최대 화제작인 ‘곡성’은 스릴러, 오컬트 등 다양한 장르가 뒤섞인 독특한 영화다. 피가 흥건한 장면과 충격적인 전개로 논란의 대상이 됐지만 관객 몰이에 성공했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아가씨’ 역시 국내에서 낯선 여성 동성애자의 로맨스를 다뤘지만 약 427만 명의 관객이 몰렸다.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최초의 ‘쌍천만’ 감독이 된 윤제균 감독은 “국내 영화 팬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요구하는 수준 높은 관객”이라며 “경쟁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가진 시나리오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구조를 계속 살릴 수 있느냐가 위기 극복의 관건”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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