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탐사기획/프리미엄 리포트/선진국 ‘新 경제 애국주의’]
금융위기 후 ‘제조업 살리기’ 바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대형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하루아침에 파산하고 직원들이 짐을 싸서 회사를 떠나는 모습이 TV로 생중계됐다. 화려한 월가 금융업의 허망함을 목격한 미국인들은 제조업 일자리의 소중함을 절감하게 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파산 위기에 처한 GM에 대한 구제금융을 시작으로 ‘제조업 르네상스’ 시대를 선언했다. 시민들은 ‘메이드 인 USA’ 제품 사기 운동으로 미국 제조업 살리기에 동참했다. 뉴욕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재미동포 사업가 K 씨(65)는 “9·11테러가 자원입대 급증 같은 안보 애국주의를 불러일으켰다면 금융위기는 ‘메이드 인 USA’ 열풍 같은 경제 애국주의를 낳았다. 중국산 성조기를 밀어내고 미국산 성조기 판매 사이트들이 급격히 늘어난 것도 금융위기 이후의 일”이라고 전했다. ○ 경제 애국주의가 21세기 물산장려운동으로
‘존 스미스는 오전 6시 중국산 알람시계 소리에 눈을 뜬다. 그의 커피 주전자는 중국산, 면도기는 홍콩산이다. 스리랑카산 셔츠를 입고 일본산 자동차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입한 휘발유를 가득 채운 뒤 하루 종일 구직 활동을 벌였지만 허탕이었다. 집에 돌아와 인도네시아산 TV를 켜고 프랑스산 와인을 마시며 생각했다. 왜 미국엔 나를 위한 일자리가 없을까.’
‘메이드 인 USA’ 제품 사기 운동을 펼치는 한 시민단체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다. 결론은 “외국산 제품만 쓰는 한 미국에 좋은 일자리는 없다”는 경고다.
미국산 제품 판매 전용 사이트 ‘메이드 인 더(the) USA’는 “미국인 1명이 미국산 제품을 구입하는 데 3.3달러만 더 쓰면 1만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며 구체적 논거까지 내세웠다. 또 “제대로 된 제조업 일자리 하나는 부수적인 일자리 5∼8개를 창출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미국산 제품 사이트 ‘메이드 인 USA’를 운영하는 토드 립스콤 씨는 “역사상 제조업 경쟁력을 상실한 제국은 모두 망했다. 미국산 제품을 사지 않으면 내 아들딸을 위한 미래도 없다는 생각에 ‘메이드 인 USA’ 활동에 전념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사이트엔 ‘미국산 나무로 미국에서 만들었음’을 자랑하는 이쑤시개를 포함해 무려 5500개가 넘는 ‘메이드 인 USA’ 상품이 올라와 있다.
미국 제조업의 상징 도시인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2011년 창업한 시계회사 ‘시놀라’는 제품군을 오디오 자전거 가죽가방 지갑 일기장 애완견 목걸이 등으로 확장하고 있다. 시놀라 관계자는 “미국 소비자를 대상으로 ‘중국산보다 비싸도 갖고 싶은 미국산 제품이 무엇인가’를 파악해 제품군을 확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CNN은 최근 “‘메이드 인 USA’ 열풍 덕분에 저가 생필품이나 장난감도 미국산이 나오면서 중국 중산층과 상류층이 이런 제품들을 역수입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 귀환하는 미국 제조업, 보호무역 부채질하는 정치권
“마침내 출혈이 멈췄다.”
2010년 창립한 비영리단체 ‘리쇼링(해외 이전 기업의 본국 귀환) 이니셔티브’의 해리 모세르 대표는 올해 초 ‘리쇼링 2015년 결산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미국 기업의 해외 이전으로 빼앗긴 일자리(6만 개)보다 리쇼링 제조업 덕분에 미국 안에 생긴 일자리(6만7000개)가 더 많았다는 뜻이다. 파이낸셜타임스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인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연평균 22만 개가 넘는 미국 일자리가 공장 해외 이전 등으로 사라진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라고 평가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기 어렵지만 ‘메이드 인 USA’ 열풍과 미국 기업의 리쇼링 트렌드는 윈윈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고 있다.
장난감 회사 케넥스가 중국 공장을 미국으로 옮겼고, 차코 킨 노스페이스 같은 아웃도어 전문 업체들도 ‘메이드 인 USA’ 대열에 본격 가세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지난해 “제조업 진흥을 위한 미국 연방정부와 지방정부의 파격적인 인센티브, 셰일가스 개발 등에 따른 낮은 에너지 비용, 금융위기 이후 달라진 미국 노동자의 인식 등 때문에 미국 생산원가의 경쟁력이 크게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대형 유통업체와 대형 투자은행들도 적극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다. 월마트는 “10년 동안(2013∼2022년) 총 500억 달러어치의 미국산 제품을 구매하겠다”고 발표했고, 대형은행 JP모건체이스는 “디트로이트 제조업 부활의 금융 파트너가 되겠다”며 1억 달러 지원을 선언했다.
애국심과 일자리가 결합된 ‘메이드 인 USA’ 열풍은 정치권에도 호재다. 임기 내내 “미국 경제의 새 엔진은 제조업”이라고 외쳐온 오바마 대통령은 요즘 수확물을 홍보하느라 여념이 없다. 지난달 레저용차(RV) 제조타운인 인디애나 주 엘크하트 시를 방문해 “정부의 제조업 부양책이 엘크하트 시의 경제 회생을 도왔다”고 자랑했다. 이 도시는 2009년 실업률이 20%대였으나 현 실업률은 전국 평균치(5%대)보다 낮은 4%다.
공화당의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는 “해외에 빼앗긴 일자리를 다 찾아오겠다”는 것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그런 주장을 하는 트럼프의 옷이나 집 안 가구, 사무실 집기는 모두 외국산”이라고 공격한다. 상원의원과 국무장관 시절 자유무역협정(FTA)의 적극 지지자였던 클린턴이 21세기 미국판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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