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자 이름을 몰라 그냥 책임자로 불렀다. 위아래를 쓰윽 훑던 프런트 직원이 귀찮다는 듯 되물었다.
“제 상관을 만나야 할 이유가 뭐죠?
“네, 저는 한국에서 온 최상철 교수라고 합니다. 5분이면 됩니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JW메리엇호텔 로비. 슈트를 말끔히 차려입은 최 교수는 한 손엔 서류 가방을, 다른 한 손엔 학교 홍보자료 뭉치를 들고 책임자를 기다렸다. 한참 뒤 책임자가 나타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신가요”라고 묻는 립카 데위 이사에게 최 교수는 다짜고짜 ‘영업’을 시작했다.
“한국의 백석문화대에서 왔습니다. 이 호텔에 우리 학생들의 일자리가 있을까요?”
교수라고 하기엔 너무 구릿빛인 피부. 기름칠로 멋을 낸 머리 스타일과 홍보자료를 들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영업사원이었다. 그래서인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제자 일자리를 구하러 호텔을 찾은 교수는 처음이었다.
“우리 학생들 한 번만 써 보시죠. 성실한 아이들입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데위 이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침 인턴 자리가 하나 있는데…. 한번 보내 보시죠.”
6개월 뒤 정규직 전환 조건이었다. 청년실업 40만 시대. 이렇게 청년 일자리가 하나 늘어났다. 최 교수는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푸름아! 일자리 하나 땄다. 얼른 준비해라.” ● 나는 교수가 아닌 ‘일자리 업자’다
“교수님, 저 이제 풀타임이에요! 야호!”
“정말? 그래, 고생 많았다 푸름아. 내가 얼른 가마.”
지난달 초 최상철 백석문화대 교수(50)에게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푸름이는 올해 1월 스물두 살의 나이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JW메리엇 호텔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최 교수가 립카 데위 이사를 만나 따낸 그 자리였다. 호텔에서 먹고 자며 일을 배웠고, 월 300달러(약 34만 원) 정도의 훈련비도 받았다. 까다로운 취업비자 역시 호텔이 해결해줬다.
그렇게 6개월을 버티니 진짜로 정규직이 된 것이다. 푸름이는 맨 먼저 최 교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JW메리엇 호텔리어. 최 교수가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자리다.
최 교수는 바로 자카르타로 갔다. 호텔 제복을 입은 푸름이가 데위 이사와 함께 마중을 나왔다. 마냥 어리게만 봤던 제자가 이제는 의젓했다.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힘든 건 없니?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 립카! 월급 더 많이 줘야 한다!”
“당연하지. 우리도 푸름 씨가 너무 좋아. 그런데 리츠칼턴 호텔 책임자도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로빈 위보 이사라고 이번에 새로 온 사람인데….”
“로빈? 그 사람 잘 알지. 자카르타로 왔어? 승진했구나!”
데위 이사의 전화를 받은 위보 이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최 교수와 위보 이사는 지난해 11월 발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도 최 교수는 무작정 호텔을 찾아가 백석문화대를 소개하고 일자리 영업을 했다. 당시 훈련 담당이었던 위보 이사는 그런 최 교수가 맘에 들었고, “앞으로 승진하면 꼭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최 교수 너무 반가워. 이렇게 만나다니 세상 참 좁다. 그나저나 우린 지금 일자리가 없고, 셰러턴 호텔에 하나 있다던데 거기에도 학생들 보내보는 건 어때?”
“정말? 지금 당장 가보자. 로빈 네가 소개 좀 해줘.”
위보 이사의 안내로 셰러턴 호텔 인사 책임자를 만났다. 한국인 직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에 최 교수는 바로 브로슈어를 꺼내 들었다. 푸름 씨처럼 해외에 취업한 학생들을 격려하고, 근무 여건을 점검하러 온 출장이 ‘일자리 영업’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날도 셰러턴 호텔 책임자는 최 교수의 적극성에 반해 채용을 약속했다.
“로빈! 네 덕분에 일자리 하나 더 따냈다. 저녁은 내가 쏠게!”
최 교수는 원래 교수가 아니었다. 이런 노하우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다. 미국 오하이오대에서 외식경영학 석사, 세종대에서 호텔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딴 뒤 이랜드 같은 대기업에서 주로 근무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 2004년 백석문화대 외식산업학부 교수로 왔다. 2년간 입학 업무를 하다가 대뜸 해외 취업 업무가 떨어졌다. 막막하기만 했다. 학교가 시키니까 시작은 했지만 아무 전략도, 노하우도 없었다.
백석문화대는 2006년부터 해외 취업을 특성화 사업으로 추진했다. 지방 전문대로 딱히 특성화 모델이 없었던 백석문화대의 승부수였다. 호텔경영과 외식사업 전공으로는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고, 무엇보다 이 분야의 전문가로 꼽히는 최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최 교수에게 특성화사업단장을 맡기고 해외 취업 교육을 총괄토록 했다.
다행히 중국에 인맥이 있는 동료 교수가 있어 처음에는 중국을 뚫어봤다. 교포 업체가 많은 호주로도 학생들을 보냈다. 주로 알선 회사를 통해 비용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일부 업체는 학생들에게 막일만 시켰고, 수수료만 떼먹고 아무 회사나 알선하는 에이전시도 많았다. 그렇게 학생들을 보내긴 싫었다.
“앞으로 개인 업체는 안 됩니다. 무조건 법인만 보냅시다.”
그래서 자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개인사업 형태의 회사는 학생들의 취업을 아예 금지하고, 가급적 법인업체의 풀타임 근무만 보내기로 했다. 한국 학생을 뽑을 회사와는 양해각서(MOU)를 맺고 월급, 근무시간 등 구체적인 근로조건을 정했다. 인턴을 원한다면 언제 정규직으로 전환해 줄 것인지도 협상했다. 2010년엔 글로벌인재육성처라는 조직도 신설했다. 교수 10여 명을 위원으로 임명해 국가별 담당을 정하고, 그곳에 있는 학생들을 책임지게 했다. 교수들이 실적을 쌓기 위해 교포 업체를 추천하면 최 교수가 직접 잘랐다.
“최소 연 매출 100만 달러 이상의 현지 법인에만 학생들을 보냅시다. 그리고 월급은 제대로 받는지, 힘든 점은 없는지 우리가 직접 관리합시다.”
최 교수의 ‘일자리 영업’은 정부나 해외 취업 에이전시, 여행사가 주최하는 일자리 박람회가 시작이다. 박람회 부스 곳곳을 누비며 무작정 명함을 돌린다. 일자리가 될 만한 기업 담당자의 이름은 무조건 스마트폰에 저장해놓고, 사진도 찍는다.
일단 번호를 딴 뒤에는 일사천리다. ‘라인’이나 ‘와츠업’처럼 외국인들이 주로 쓰는 메신저로 수시로 연락하며 친분을 쌓는다. 그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밥을 사고 집으로 초청한다. 그렇게 친해진 다음 출장을 가서 직접 ‘영업’을 하면 정말로 일자리가 생겼다.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해 놓고, 교수가 직접 발로 뛰고 학생들의 실력을 보증해야 생기는 것이 해외 일자리였다. 이도저도 안 될 때는 무작정 해외로 나가 일자리를 따왔다.
그렇게 10년 동안 해외를 누볐다. 제자들의 미래를 위한 ‘일자리 영업’을 하고 또 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았다. 제자 임장교 씨(25)가 그렇다. 실업계 고교를 졸업하고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해 처음 본 토익 점수가 ‘발 사이즈’(200점대)였던 그는 지금, 중국 쑤저우의 대기업 호텔 정규직원이다. 그것도 중국어 능력자도 힘들다는 프런트에서 근무한다.
태국 메리엇 리조트에 있다가 영어를 너무 못해 3개월 만에 해고당한 여학생도 최 교수에겐 소중한 제자다. 이 학생은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나가서 일하고 싶다”며 울먹였다. 최 교수는 이 학생을 다시 훈련시키고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일자리를 알아봤다. 다행히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허가를 해줬고,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당당히 일하고 있다.
이렇게 10년간 최 교수의 손을 거쳐 외국으로 나간 ‘발 사이즈 토익’ 청년은 약 650명. 1년에 약 60명씩 해외로 나간 셈이다. 많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지방 전문대로서는 가슴 벅찬 수치다. 싱가포르 사우스비치 호텔은 최 교수만 믿고 매년 7명씩 백석문화대 학생을 뽑을 정도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일자리 해외진출 분야 대통령 표창을 최 교수에게 수여했다. 해외진출 분야에서 대학교수가 표창을 받은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나는 교수가 아니라 ‘업자’예요. 일자리 업자. 업자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뭐합니까. 돌아다니고 사람을 만나야 물건이 팔리죠.” 업자 최상철은 오늘도 영업을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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