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말수가 부쩍 늘었어요. 얼마 전에는 스승의 날에 ‘1일 선생님’을 해달라는 부탁도 하더군요. 제가 며느리 노릇도 좀 더 할 수 있게 됐고요.”
여행사 하나투어의 김신영 과장(36·여)은 올 1월부터 서울 성동구에 있는 집 근처 스마트워크센터로 출근한다. 그녀의 집에서 스마트워크센터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평일 오전 8시 40분쯤 집을 나와 5분 거리인 어린이집에 두 아이를 데려다주고 가도 9시 이전에 도착한다.
작년만 해도 김 과장은 아침마다 현관문에서 우는 아이들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야근 때면 아이들을 돌봐주는 친정어머니에게 항상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이랬던 그녀의 삶은 스마트워크에 참여한 이후 180도 바뀌었다.
2300여 명의 임직원을 가진 하나투어에는 김 과장처럼 스마트워크센터로 출근하는 직원이 545명이나 된다. 이 회사는 2011년부터 유연근무제의 일환으로 거점근무제(스마트워크센터 근무)와 시차출퇴근제(출퇴근 시간을 근로자가 조정), 재택근무제 등을 도입해 1223명이 혜택을 보고 있다.
유연근로제 덕에 이직률은 2011년 9.3%에서 지난해 5.8%로 줄었고, 여직원 비율은 같은 기간 50.9%에서 55.5%로 늘었다. 매출액은 4년 새 59.0% 증가하는 등 생산성도 향상됐다. 하지만 다수의 국내 기업은 아직 스마트워크 도입을 주저하는 분위기다.
● 재택근무 ‘1주 1회’ 의무화… 수도권 11곳에 ‘집 앞 사무실’
더 이상 ‘지옥철’(붐비는 지하철을 지옥에 빗댄 말)은 없다. 회의 때문에 멀리 있는 본사까지 찾아가는 ‘원정 미팅’도 없다. 아이를 누가 어린이집에 맡기러 갈지 아침부터 다툴 필요도 없다.
스마트워크가 일상화된다면 일어날 변화다. 아직 스마트워크가 크게 확산되지는 않고 있지만 일부 기업은 그 싹을 틔우고 있다. 스마트워크 시대를 먼저 살고 있는 ‘스마트워커’들은 시간과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유로운’ 근무를 하고 있다. 사장 자리도 따로 없죠…‘빈자리가 내 자리’
유한킴벌리는 2011년 8월 스마트워크를 시작했다. 변동좌석제를 도입하며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본사에 임직원 수의 80%에 이르는 좌석과 라운지를 준비했다. 직원들은 각자 사물함에서 노트북PC와 서류를 꺼내 빈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한다. 임원실도 없앴다. 과거 임원실의 활용도를 조사한 결과 근무시간의 60%가 비어 있는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공간 혁신 이후 유한킴벌리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변동좌석제 등 업무 공간을 바꾼 후 업무 집중도가 높아졌다는 응답이 77%나 됐다. 다른 본부나 팀과의 협업이 늘어났다는 응답도 79%였다.
유연근무제 등을 도입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사무실 공간도 업무 성격에 맞춰 최적화했다. 사무실로 쓰고 있는 건물의 11∼16층에 1∼40인실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무공간을 마련한 것이 대표적이다. 원형 테이블, 일직선 테이블이 놓인 곳부터 소파만 놓인 곳까지 디자인은 각양각색이다. 사원부터 사장까지 지정 좌석이 없기 때문에 원하는 공간에 가 근무를 하면 된다.
이승연 MS 홍보팀 부장은 “일을 하다 보면 혼자 집중해서 해야 하는 경우와 팀원 중 한 명과 집중적으로 협의해야 하는 경우 등 업무 성격이 다양한데, 모든 직원에게 매일 같은 공간에서 같은 근무시간에 일하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일의 효율을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굳이 회사 갈 필요 있나요… 원격근무·재택근무도
재택근무가 필요한 경우 팀장이 나서 권장하고 자연스럽게 이를 선택할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었다.
최민영 유한킴벌리 인사기획부 과장(32·여)은 사내 스마트워크 문화가 정착되면서 임신 7주 차부터는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임신부로서 1시간가량 걸려 고생스러운 출근을 하던 최 과장은 “지옥철 공포증에서 벗어났다”며 기뻐했다.
현재 그는 오전 8시 50분경 서재에 들어가 노트북을 연다. 그리고 메신저와 영상통화 시스템을 활용해 업무를 시작한다. 정보통신 기술들 덕분에 회사로 출근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환경이다. 최 과장은 “첫 아이라 떨렸고 배 통증, 어지러움 같은 초기 증상이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재택근무를 팀장님이 먼저 권해 주셔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집 앞의 회사’를 가능케 하는 스마트워크센터도 속속 생겨나고 있다. 하나투어는 서울 신도림, 노원, 왕십리 등을 비롯해 수도권에 11곳의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곳곳에 사무실을 마련해 직원들이 출퇴근 때문에 길에 많은 시간을 버리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신한은행도 지난달 25일 국내 은행권 최초로 유연근무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며 ‘스마트워킹센터’를 마련했다. 본부 직원과 영업점 중 외부 섭외 담당자처럼 홀로 업무를 처리해도 되는 이들이 대상이다. 전날까지 은행 인트라넷에 신청해 부서장의 결재를 받으면 스마트워킹센터로 출근할 수 있다.
MS에는 원격근무 및 재택근무 허가에 관한 결재 자체가 없다. 상사에게 전날 구두 보고만 하면 된다. 재택근무를 쓸 수 있는 횟수에도 제한이 없다. 자신의 업무 성격과 일정에 따라 자유롭게 조정하면 된다. 몇몇 팀은 1주일에 1회 이상 재택근무를 하도록 규율을 정하기도 했다.
되찾은 아이들과의 아침·저녁
신한은행 글로벌개발부 백미경 과장(40·여)은 요즘 출퇴근길 발걸음이 가볍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두 아이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20여 분이 걸려 백 과장이 출근하는 곳은 서울 강남구에 있는 스마트워킹센터다.
원래 백 과장의 사무실은 서울 송파구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 거리인 경기 고양시에 있었다. 늦어도 오전 6시 반엔 집을 나와야 했고 퇴근해서도 오후 9시나 돼야 집에 도착했다. 백 과장은 “두 아이의 눈 뜬 모습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건 주말에나 가능했다”며 “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사는 건가 싶어 직장을 그만둘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스마트워크는 아이들과의 아침과 저녁을 되찾아줬다. 출퇴근 시간이 줄어들자 업무 집중도도 한층 향상됐다. 집이 가까우니 행여나 아이들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 달려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훨씬 안정됐기 때문이다.
백 과장은 “요즘은 해가 떠 있을 때 집에 가니 저녁에 아이들과 산책도 할 수 있다”며 “무엇보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큰딸에게도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강윤영 MS 중소기업팀 클라우드 담당 부장(36·여)도 요즘은 6세 딸이 유치원 버스에 오르는 걸 볼 수 있게 됐다. 유연근무제 덕분에 오전 8시 반에 아이를 버스에 태우고 10시가 넘어서도 출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가 5월 유연근무제를 도입했거나 검토 중인 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근로자의 96.7%는 일과 가정의 양립, 96.0%는 직무 만족이라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답했다. 기업 역시 생산성 향상(92.0%), 이직률 감소(92.0%)에 도움을 받았다고 응답했다. ※ 스마트워크(Smart work)
똑똑하게 일한다는 의미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정보기술 인프라 등을 활용해 일을 처리하는 업무환경을 뜻한다.
박창규 kyu@donga.com·강성휘 기자 곽도영 now@donga.com·김성모·김재희 기자 박다예 인턴기자 서울여대 언론홍보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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