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기자 시절 특이한 국정감사를 본 적이 있다. 2000년대 초반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에 대한 국정감사였다. 여야 의원들이 치열한 공방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감사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른 국정감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여야 의원 간 삿대질이나 언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 농림부 관료들이 예산 부족으로 농민지원 사업 추진이 어렵다는 답변이 나오면 감사장은 시끄러워졌다. “현실을 모르는 예산 당국(당시 기획예산처)이 농민들 다 죽인다.” “농림부에 힘을 실어줘 농민들을 보호해야 한다.”
여야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예산 당국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가면 농림부 관료들은 ‘표정관리’를 했다.
그해 국정감사가 끝난 후 사석에서 만난 예산처 고위 관료 A 씨에게 농림부 국감장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고 하자 가시 돋친 ‘반론’이 쏟아졌다. A 씨는 한국에서 결속력이 가장 강한 정당은 여당도 야당도 아닌 ‘농민당’이라는 말부터 꺼냈다. 그는 “농촌 지역구 의원들은 농민 지원 관련 예산 문제가 나오면 여야 구분 없이 뭉친다”며 “이들은 국익이나 경제적 효과보다는 표를 의식한 ‘농민 보호’ 전략이 우선이어서 농업 관련 예산을 보조금이나 지원금 위주로 집행토록 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또 “농림부도 예산을 조금이라도 더 따내기 위해 ‘농민당’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아 농민들이 자생력을 키우기보다는 보조금에 의존하는 등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커졌다”며 “한국 농업이 시장 개방 이후 다른 산업과 달리 경쟁력을 높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농민당과 농림부의 ‘과잉보호’가 한국 농업 발전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였다.
최근 LG그룹이 농민단체들의 반대로 새만금산업단지에 ‘스마트팜’ 단지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사실상 백지화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A 씨 생각이 났다. 이번 백지화의 배경에는 그가 지적한 한국 농업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농민단체들은 올 초 이 계획이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반대했다. LG 측이 “스마트팜에서 생산할 작물을 모두 수출할 것”이라고 설명해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대기업이 농민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얘기만 했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전형적인 현실 안주 논리였다.
농식품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농민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과잉보호 본능이 다시 한 번 발동한 셈이다. 그동안 농업을 스마트팜 등 6차산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다수 농업 전문가는 스마트팜이 한국 농업이 가야 할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지 면적이 좁아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없는 한국적 특성을 감안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민단체들은 농민당과 농식품부가 만들어준 ‘온실’ 안에서 ‘화초’로만 지내길 원한다. 혁신이나 경쟁, 도전과는 담을 쌓고.
농민단체들은 과거 쌀 관세화 문제가 나왔을 때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일단 ‘무조건 반대’를 해놓고 정부에 지원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의무수입물량만 떠안은 채 관세화가 이뤄졌다. 애초부터 ‘대세’인 관세화를 받아들였다면 의무수입물량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국내 쌀 재배 농가의 운신의 폭이 더 넓어졌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빨리 가는 게 낫다. 온실에서도 나와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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