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불안한 미래와 폴리네시아인의 비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9일 03시 00분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면 인간은 다양한 수단을 이용해 ‘저축’을 한다. 장기간의 항해를 통해 태평양 구석구석으로 이주한 폴리네시아인들은 체내에 지방을 많이 저장하는 방식으로 바다 위에서의 배고픔에 대비했다. 동아일보DB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끼면 인간은 다양한 수단을 이용해 ‘저축’을 한다. 장기간의 항해를 통해 태평양 구석구석으로 이주한 폴리네시아인들은 체내에 지방을 많이 저장하는 방식으로 바다 위에서의 배고픔에 대비했다. 동아일보DB
문권모 경제부 차장
문권모 경제부 차장
인간은 끊임없이 미래를 생각하고 그에 대비하는 존재다. 이 능력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간은 항상 미래를 염두에 둠으로써 종족의 생존을 도모하는 동시에 문명의 발전을 이뤄왔다.

이런 인간의 본능은 당연히 가장 중요한 인간 활동 중 하나인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경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개별적 현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미래를 준비하는 인간의 본능이 경제의 큰 흐름을 어느 방향으로 끌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제 현재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몇 가지 경제적 현상을 살펴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걱정, 즉 ‘겨울’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소비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국민들이 갈수록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청이 이달 19일 발표한 2분기(4∼6월) 가계 동향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의 평균소비성향(가처분소득에서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0.9%로 관련 통계가 작성된 2003년 1분기(1∼3월) 이후 최저치였다. 특히 학원·보습교육 지출(―2.1%)과 식료품·비주류음료 지출(―4.2%) 등이 많이 줄었다.

이런 와중에 술 소비는 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국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세수 가운데 주세는 3조2275억 원으로 전년보다 13.2% 급증했다. 올해도 오름세는 이어지고 있다. 통계청의 2분기 가계조사에 따르면 담배·주류 지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 늘었다. 술 소비가 늘어난 이유는 뭘까. 술은 인간의 의식을 ‘바로 이 순간’에 고정시키는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상념 중 대부분은 과거에 대한 후회·반추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술은 이런 인간의 사고를 현재에만 집중하게 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걱정을 잊고 순간적 쾌락을 느끼게 한다.

세 번째 경제현상은 왕성한 ‘저장 활동’이다. 소비 감소와 저축 증가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두 현상을 지지하는 원동력이다. 한국은행은 소비 진작을 통해 내수경기를 활성화한다는 목표 아래 올 6월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췄다. 하지만 가계저축은 계속 늘고 있다. 2011년 3.86%였던 우리나라의 가계저축률의 올해 추정치는 8.82%나 된다.

인간은 마음이 불안해지면 돈 이외에도 여러 가지 수단을 이용해 저축을 한다. 장거리 항해를 통해 태평양 전역으로 이주했던 폴리네시아인들은 항해 중 닥칠 배고픔에 대비해 지방을 대량으로 체내에 저장하는 ‘비만 유전자’를 발전시켰을 정도다. 당장 우리 주변을 돌아보자. 노후가 불안한 노년층이 아파트는 물론이고 오피스텔, 다세대주택 등 부동산을 계속해서 사들이고 있다. 사회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선진국에선 노년층이 우리처럼 ‘맹렬하게’ 저축하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현상들이 계속되면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신용경색, 다시 말해 ‘돈맥 경화’가 일어날 수 있다. 신용경색은 내수경기를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있다. 미래가 불안해 살을 찌운 폴리네시아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성인병 유발률로 고생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는 정치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미래에 대한 국민의 불안을 없애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가 불안하지 않아야 국민들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含哺鼓腹·함포고복) 세상 시름을 잊는다.

정치의 중요성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관련된 극단적인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글로벌 정보분석기업 닐슨이 이달 초 발표한 ‘2016년 2분기 주요 63개국 소비자신뢰지수 조사’에서 필리핀은 세계 1위(지수 132)를 차지했다. 별다른 경제적 모멘텀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닐슨 측은 ‘두테르테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봤다. 인권 관련 논란이 있지만, 두테르테가 1800명에 가까운 마약범을 사살하며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중대범죄 발생률이 31%나 떨어진 덕분이란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한국은 최하위(지수 45)였다.

지난주 우리 정부는 우리 경제의 ‘뇌관’인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부동산 공급을 줄여 가계부채 증가세를 둔화시키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발표가 나자마자 여기저기서 공급 감소로 오히려 아파트 가격이 더 오를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대책은 미래에 대한 국민들의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었어야 한다. 가계부채 대책이 발표된 날 국민들이 이전보다 술을 얼마나 더 또는 덜 마셨는지 알아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문권모 경제부 차장 mikemoon@donga.com
#폴리네시아인#비만#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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