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한국, 성장-분배 모두 위기… 구조개혁 이끌 통합리더십 절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9일 03시 00분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와 구조개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한국 경제가 계층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자본주의 체제 위기, 양극화가 깊어지는 분배 위기,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성장 위기 등 3가지 위기에 당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와 구조개혁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한국 경제가 계층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자본주의 체제 위기, 양극화가 깊어지는 분배 위기, 잠재성장률이 떨어지는 성장 위기 등 3가지 위기에 당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한국 경제 위기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최근 경제학자와 정책 당국자 사이에서 필독으로 읽히는 논문이 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겸 중앙대 명예교수(80)가 집필한 ‘한국 경제의 위기와 구조개혁’이라는 논문이다. 그는 “평소 하고 싶던 말을 논문에 담았다”며 “아마 마지막 논문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경제학회가 발간하는 ‘한국경제포럼’의 최근호는 이 논문을 실었다. 박 전 총재는 한은 퇴임 직후부터 별도의 사무실이나 비서를 두지 않고 자택에서 혼자 집필·연구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1시간 반가량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경제의 현황을 조목조목 진단하면서 일부 지점에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 경제의 위기 극복방안을 총체적으로 제언하는 모습에서는 오랜 기간 관계와 학계에 몸담은 관록이 엿보였다. 》

 
교육마저 세습 수단… 위험 사회
 
―논문은 어떻게 구상하시게 됐습니까.


“우리 사회의 가장 아픈 대목은 계층 상승의 희망이 사라진 것이에요. 어느 사회나 잘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이 있죠. 하지만 적어도 내 자식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 살맛나잖아요.”

―스스로는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 타셨죠.

“네. 전북 김제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개천에서 난 용’이 됐죠. 하지만 오늘날엔 이런 게 불가능해졌죠. 교육마저 계층 이동이 아닌 계층 세습의 수단이 됐으니까요. 흙수저,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등의 어휘가 입증하죠. 대학 입학이 어렵고, 대학 가도 취업이 힘들고, 취업 돼도 집 사기 힘들고, 40대엔 퇴직을 고민하고, 60대엔 노후 보장 걱정하고…. 우리가 상당히 위험하고 불안한 사회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위험한 사회라 보시는지….

“한국의 자본주의는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은 미국보다도 더 개인주의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어요.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이 자본 축적에서 중요한 수단이죠.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개인은 부(富)를 쌓았지만 사회적으로는 주거비와 생산원가가 올랐죠. 개인이익의 상당 부분은 사회이익의 희생으로 이뤄져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이 팽배한 거죠.”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가 낳은 폐해는 뭔가요.

“한국 경제가 성장의 위기 못지않게 분배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거죠. 현실에선 잘난 사람뿐 아니라 못난 사람도 함께 살아야 하는데, 무한 경쟁과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정부의 조정 기능이 미약해요.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 이르렀는데도 국민의 삶은 정체됐어요. 출산율과 노인 빈곤율·자살률 등 생활의 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죠.”

‘가계 빈혈’ 따른 민생 위기 우려

―국가는 잘살게 됐는데 국민은 나아지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엄밀히 말하면 ‘가계 빈혈’로 민생 위기를 겪기 때문이죠. 대기업 소득이 다른 부문으로 전달되지 않죠. 심장에서 나온 피가 온몸으로 돌아야 하는데, 순환이 안 되는 거죠. 대기업이 돈 벌어도 일자리를 창출 못해 혈관이 막히는 뇌졸중 위험도 있어요.

―일자리 불임 사회가 된 것이군요.

“국내 실업자 80만 명, 이 중 청년 실업자가 40만 명인데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창출한 고용은 100만 명이에요. 임금과 땅값 교육비 등 각종 비용이 오르고 노사 분규가 투쟁적으로 바뀌었죠. 국내에 투자해도 수지가 안 맞아 해외에 나가는 기업이 많아졌죠. 연 평균 3%라는 성장의 과실조차 가계로 전달이 안 돼서 가계가 먹고살기 힘들어지는 거죠.”

―그간 경제 정책에서 가계를 등한시한 영향도 있지 않나요. 소비가 죄악시되던 시절도 있었는데….

“산업화 시대엔 대기업이 돈 벌면 국내 투자해서 고용을 늘린다는 낙수효과(trickling effect)가 통했어요. 가계가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려 기업이 투자하게 자금을 대주라는 논리죠. 지금은 대기업이 돈 벌면 해외 투자하거나 사내 유보로 쌓아두죠. 이젠 가계 소비를 늘려 기업 소득을 늘리게 하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분수효과(fountain effect)를 노려야 하죠.”

―소비를 늘리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2013∼2015년 민간소비는 연 평균 1.9% 증가에 그쳤지만 이 기간 경제성장률이 연 3%임을 감안하면 경제성장률만큼만 소비가 늘어도 경제성장률이 4%로 높아질 수 있죠. 가계 소득을 늘리고 가계 부채를 줄여서 가계가 마음 편히 소비할 수 있게 하는 거죠.”

산업화 시대 낡은 이념 버려야

―대기업과 수출, 제조업 위주의 성장론이 약발을 다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나요.

“산업화 시대 이념을 버리지 않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어요. 당시엔 투자처도 많고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죠. 자본과 기술을 수입하고 제품을 생산·수출해 고도성장했죠. 1990년대까지 투자 수출 제조업 모두 연 평균 10%대로 성장했고, 경제성장률도 연 평균 7∼8%나 됐죠. 하지만 나이 들면 잘 먹는다고 체력이 좋아지지 않아요. 지금은 성장률이 연 3%를 넘기기 힘들고 수출은 오히려 줄고 있죠.”

―지금의 침체 국면이 역대 위기와 다른 점이 있나요.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근본적으로 달라요. 과거엔 성장 능력(잠재성장률)이 양호해 성장을 떨어뜨린 요인을 제거하면 복원됐죠. 지금은 잠재성장률이 잘해야 3%일 정도로 곤두박질쳤고 실제 성장률과 잠재 성장률이 비슷해졌어요. 이건 경기순환적 침체가 아니라 장기적·구조적 침체로 봐야 해요.”

―올해 6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렸고 정부도 경기 부양책을 펴고 있는데….

“구조적 침체기에 금리 인하 등의 경기부양책을 펴면 치료제가 아니라 진통제가 돼요. 당장 효과가 있는 것 같아도 미봉책이죠. 일본도 1990년대 구조적 침체를 엔화 절상에 따른 일시적 침체로 ‘오진’해 경기부양책을 폈다가 자산 가격이 폭등했고 이후 거품이 꺼져 아직도 제로 성장을 하고 있죠. 한국도 이대로 10년 가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안 된단 보장이 없어요. 부동산 등 자산 거품만 남길 우려가 있죠. 최근 저금리로 가계부채 증가율이 가파르게 오르는 게 위험신호죠.”

―구조적인 침체에 대한 대응방안은 무엇입니까.

“강도 높은 성장개혁과 분배개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해요. 노동·규제·교육개혁, 저출산 고령화 대책 등이 포함된 성장개혁과 양극화 해소, 빈부격차 축소, 사회보장 확대 정책을 아우르는 분배개혁을 추진하는 거죠.”

―개혁에는 비용이 수반되는데요. 세제 개편이 필요한 사안이 아닌가요.

“각종 사회보험료 현실화, 공기업 흑자경영과 부채축소, 공공부문 연금 개혁 등 재정건전성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론 개혁에 연간 100조 원이 들 걸로 추산합니다. 증세도 포함되죠. 현재 최고소득에 대한 소득세율이 38%인데, 연 5억 원 이상 고소득자에겐 더 높은 누진세를 적용하고, 법인세나 개인소득세의 면세자 비율도 낮춰야 한다고 봅니다.”

성장-분배 개혁 동시 추진해야

―부동산 세제 개편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부동산 보유세도 높여야 합니다. 자산에 대한 보유 과세도 한국은 선진국의 10∼20%에 불과해요. 전 평생을 단독주택에 살다가 관리가 힘들어 대형 아파트(200여 m²)로 이사했어요. 명절에 아들딸에 손자손녀까지 20여 명이 몰려와 대형 평수를 택했죠. 그런데 아파트 보유세가 연간 200만 원이에요. 일본·유럽 같으면 어림도 없죠. 저 같은 사람이 세금 제대로 내야 해요.”

―부동산 보유세가 오르면 집값에 영향이 있지 않겠습니까.

“부동산을 경기부양책 수단으로 삼는 정책은 이제 그만해야 해요. 우리 세대가 집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으면 자식이나 손자 세대들이 희생하게 돼요. 한국 사회의 고비용 구조는 60년간의 부동산 가격 상승과 연관이 있죠. 다만 부동산 가격을 가파르게 내리면 부작용도 커서 현 수준에서 장기적으로 안정시키되 가계소득을 늘려 주거비를 내려야 합니다. 장기임대주택 건설을 중점 추진해 젊은이들이 살 집도 마련해야 하고요.”

―성장을 위한 구조 개혁과 관련한 의견은….


“현 교육 제도는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계층 대물림의 역할을 하죠. 또 대졸자 초임이 고졸자 초임보다 60%나 높은데 대졸자 실업률은 고졸자 실업률보다 높아요. 직업 교육에 대한 전면 개편이 필요해요. 고임금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위주의 노조가 강경 투쟁으로 기득권을 지키며 기업 경쟁력을 악화시키고 있어요. 대부분의 근로자가 노조에서 소외되어 있어서 노조가 대표성을 지니지 못하죠. 아울러 규제개혁, 공공부채 감축과 정부 개혁 등으로 체질을 바꿔야 해요.”

―일부 사안은 이해관계가 충돌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조개혁의 동력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구조개혁은 엄청난 변화를 수반하죠. 성장·분배 개혁을 패키지로 동시 추진하고 국민 통합운동과 연계하는 거죠. 대기업은 노동개혁, 규제개혁이 이뤄지면 법인세를 더 낼 수도 있고, 근로자는 소득재분배 정책으로 노동 복지가 개선되고 실업 노후 대책이 강화되면 노동개혁에 동의할 수 있겠죠. 2003년 독일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노동개혁은 이런 식으로 성공했죠. 무엇보다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해요. 하루 속히 개혁이 이뤄져야 합니다.”
 
:: 박승 전 총재는 ::
 
△1936년 전북 김제 출생
△이리공업중고교,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석·박사
△1976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86년 한국국제경제학회장
△1988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1988년 건설부 장관
△1990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93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1997년 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1999년 한국경제학회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2006년 한국은행 총재

 
인터뷰=김유영 기자 abc@donga.com
#박승#전 한국은행 총재#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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