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통 수제맥줏집… ‘대박 창업’ 갈증 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30일 03시 00분


[청년사장 전통시장 진출기]<1>광주 송정역시장 이한샘씨

《 동아일보는 최근 다양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전통시장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게재합니다. 열정과 패기로 시장에 진출한 젊은이들의 창업 스토리, 시설 현대화와 고객 맞춤 서비스로 진화한 골목시장 등을 통해 지역경제의 활력소가 된 전통시장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

광주 광산구 ‘1913 송정역시장’에 수제맥주 전문점 밀밭양조장을 창업한 이한샘 씨는 “새로운 맥주문화를 내 고향에 소개하고 사람들과 나눈다는 점이 뿌듯하다”며 “재래시장의 역사와 멋, 고풍스러움을 지켜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광주 광산구 ‘1913 송정역시장’에 수제맥주 전문점 밀밭양조장을 창업한 이한샘 씨는 “새로운 맥주문화를 내 고향에 소개하고 사람들과 나눈다는 점이 뿌듯하다”며 “재래시장의 역사와 멋, 고풍스러움을 지켜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광주=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서울에서 오셨구나. 지난주에 새로 만든 맥주인데 어떠세요?”

“과일향이 좋네요. 여자친구가 정말 좋아하겠는데요.”

18일 오후 10시경 KTX 광주송정역 인근 ‘1913 송정역시장(옛 송정역전시장)’. 시장 골목 중간쯤에 있는 수제맥줏집 ‘밀밭양조장’에서는 여름밤 시원한 맥주를 마시러 온 손님들의 수다와 맥주잔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20대 남녀 커플이 자리를 잡고 ‘샘플러’를 주문했다. 샘플러는 이곳에서 파는 5종의 맥주를 모두 맛볼 수 있는 맛보기 메뉴다. 잔잔한 과일향의 ‘골든에일’을 맛본 남자는 곧 이 맥주를 여자친구에게 권했다.

옆 테이블에서는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 5명이 연신 맥주를 추가 주문했다. 홉 향이 진한 ‘스트롱에일’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시멘트 외벽을 그대로 드러낸 인테리어, 쇠파이프와 나무로 만든 의자와 테이블, 빵모자와 멜빵바지 등 1900년대 초 미국 노동자의 옷차림을 연상시키는 종업원 복장…. 수제맥주와 잘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 전국 돌아다니며 맥주공부

다음 날 이곳을 다시 찾아 이한샘 사장(25)에게 시장 창업 스토리를 들었다. 이 씨는 올해 4월 이곳에 밀밭양조장을 열었다. 원래 광주 조선대 앞에서 19m²(약 6평) 남짓한 규모의 카페를 운영하던 이 씨는 지난해 서울에 놀러왔다가 전환점을 맞았다. 친구와 점심을 먹으려 이태원을 찾았는데 한 외국인이 야외 테이블에서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낮맥(낮+맥주)’을 연신 들이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맥주 한 잔에 사람이 저렇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보통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풍경. 하지만 카페를 운영하며 외식업에 인생을 건 이 씨의 머릿속에선 불꽃이 튀었다. 새로운 분야에 마음이 끌린 이 씨는 맥주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고향 광주와 달리 서울에는 수제맥주 열풍이 불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서울서 처음 맛본 수제맥주의 묵직한 맛은 다음 날에도 자꾸 생각났다.

‘우리 동네에는 이런 맥주가 없는데. 고향 사람들에게 이런 맥주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

그때부터 매일 읽고, 찾아가고, 마시는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 친구집에서 석 달을 신세지며 매일 수제맥줏집 서너 곳을 찾아가 맛봤다.

전북 고창에 유명한 ‘브루마스터(양조기술자)’가 있다는 말에 찾아가 맥주 제조 과정을 배웠다. 카페를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창업을 준비하던 터에 광주 송정역시장 리모델링 프로젝트에서 입점 상인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씨는 재래시장과 새 트렌드(수제맥주)의 공존이라는 아이디어로 응모했고 옛 새마을금고 건물을 분양받아 지금의 밀밭양조장을 열었다.
○ 주민, 관광객 찾는 명소로

요즘 밀밭양조장을 찾는 손님의 절반은 관광객이다. 주로 젊은이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스타그램이나 인터넷 블로그에서 후기를 보고 찾아온다.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도 종종 온다. 이 씨는 “개업 초기에는 주민들이나 시장 상인이 대부분이었다”며 “송정역시장이 명물로 유명해지고 맥주 맛도 알려지면서 외지 손님이 늘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지금처럼 자리를 잡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영화제작사에 들어갔는데 그나마도 오래 다니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며 카페 창업을 준비할 때도 부모님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 씨의 어머니는 매일 새벽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 커피 찌꺼기투성이로 돌아오는 아들을 볼 때마다 “남들처럼 편한 회사원 하지 왜 험한 길을 고집하느냐”며 눈물을 훔치셨다. 이 씨는 “대출까지 받아 창업했지만 부모님께는 손을 벌리지 않았다”며 “지금은 두 분도 수제맥주 가게 운영을 지지해 주신다”고 말했다.

이 씨는 전통시장에 대해 “낡고 오래됐지만, 역사가 쌓인 곳은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내 번화가가 아닌 재래시장에 자리를 튼 것도, 가게 인테리어를 최신 유행이 아니라 옛 느낌으로 꾸민 것도 이런 생각에서다. 이 씨는 “주변 상인들과 워크숍도 가고, 서로 도와주고 왕래하며 정이 쌓였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처럼 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그 분야가 재밌고 좋아서 미칠 지경이 돼야 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면 언젠가 성공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광주=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수제맥주#청년창업#전통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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