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고기’가 무엇인지 몰랐다. 돼지고기라고는 삼겹살, 목살 정도만 알았다. 기껏해야 뒷다리살 정도만 들어본 적 있었던 평범한 30대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대전에서 유명한 ‘뒷고깃집 사장님’이다. 찾아오는 손님에게 “콧살 드셔 본 적 있나요? 고소한 게 자꾸만 손이 가는 부위예요”라고 권하는 정윤아 요기조기고기 사장(34·여)의 이야기다.
대전 중구 수침로 태평전통시장에 있는 요기조기고기는 요즘 이 지역에서 ‘뒷고기 명소’로 꼽힌다. 뒷고기는 도축 후 남은 부위를 버리지 않고 판매하는 고기다. ‘덜미살’, ‘콧살’, ‘눈살’, ‘볼살’ 등 생소하지만 삼겹살과는 색다른 맛으로 미식가들의 입을 사로잡는 부위이기도 하다.
2일 만난 정 씨는 “‘고깃집 딸’로 자랐지만 내가 고깃집을 운영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10여 년간 대전에서 고깃집을 운영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정작 자신은 미술이 좋아 고등학생 때 그림을 공부해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첫 직업으로 네일아티스트가 됐기 때문이다. 손톱을 꾸미는 게 천직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근무하던 네일아트숍이 지난해 갑작스레 문을 닫으며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음식 장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라던 친구들의 권유가 생각났다.
학생 때부터 고깃집 딸로서 어깨 너머로 배운 그의 요리 솜씨를 친구들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같은 태평시장에서 건어물집을 하는 이모, 음식점 선배인 어머니의 권유를 응원 삼아 새로운 결심을 했다. ○ “창업은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자영업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서른셋 청년에게 ‘가본 적 없는 길’이었다. 그러던 중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 실시했던 청년상인 창업지원 사업을 접했다. 질 좋은 돼지고기를 확보해 손님상에 올리는 ‘고깃집의 기본 구조’는 알고 있어 자신도 있었다. 지원을 받기 위한 면접장에서 “다른 사람보다 고깃집에 대해서는 준비가 잘된 인물”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깃집 딸이 고깃집 사장이 되는 과정에 대해 그는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 정 씨는 ‘시장 선배’들을 찾아 메뉴 선정부터 운영 방식까지 고깃집을 운영하기 위한 모든 것을 묻고 들었다. 이용수 태평전통시장 상인회장(46)과 어머니를 비롯한 창업 선배들은 그의 멘토가 되어 주었다.
“뒷고기를 메뉴로 골랐던 건 상인회장님의 아이디어였어요. 돼지고깃집 하면 그동안 삼겹살이 대부분이었지만 뒷고기는 사람들의 관심이 적고 가게도 흔치 않았던 ‘블루오션’이었던 거죠. 그때 뒷고기가 무엇인지 알게 됐어요. 전국의 유명한 뒷고기집들을 찾아 볼살, 콧살 등 생소한 부위를 먹어보며 고소하고 쫄깃한 맛에 ‘이거면 되겠다’ 싶었답니다.”
중소기업청과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서는 ‘경영 수업’을 받았다. 가게를 방문한 손님에게 인사하고 메뉴를 권하는 방법처럼 간단해 보였던 것도 다시 배우니 그의 눈에는 새로웠다. 정 씨는 “특히 세법 공부는 어려웠다. 가게를 운영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마케팅과 함께 중요한 것이었지만 공부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점포 내부는 흰색 벽에 벽돌로 장식을 해 여느 고깃집과 달리 밝은 모습이다. ‘저비용 고효율 인테리어’를 추구하며 남동생과 직접 벽에 칠을 하고 벽돌을 사다 붙인 정 씨의 노력이다. 미술을 해온 그의 갑작스러운 ‘장사 선언’에 처음에는 놀랐지만 지금은 단골이 된 친구들은 든든한 응원군이다.
○ 고깃집의 기본은 ‘고기’…“창업 겁내지 말라”
창업을 준비하면서 그가 절대 타협하지 않은 건 ‘고기’다. “고깃집 고기는 비싸더라도 좋아야 한다”는 걸 창업을 결심하며 제1의 원칙으로 삼았다. 전국의 유명한 돼지고기 가공업체를 돌며 1∼2kg씩 구입해 먹으며 고기를 골랐다. 4인 가족 기준으로 1kg 남짓 먹는 게 보통이지만 도매상들에게서 직접 구입하다 보니 많이 사먹게 됐다.
정 씨는 도축한 지 이틀 이내의 돼지고기만 판다. 냉장 상태로 도축 후 보름까지는 문제가 없지만 가능하면 신선한 고기를 상에 내고 싶다는 고집이었다. 남는 고기는 이웃 상인들과 회식을 하며 먹거나 집에서 가족들 상차림에 내놓는다. 하지만 뒷고기는 삼겹살보다 수요가 적어 모든 부위를 200g 기준 8000원에 팔아 소비자 부담도 없다.
올 4월 문을 연 요기조기고기에는 이제 단골도 생겼다. 정 씨는 “잘 먹고 갑니다. 또 올게요”라는 손님의 말 한마디에 힘을 얻는 청년 사장이 됐다. 지난해 9월부터 창업을 준비했으니 벌써 1년이다. 혹시 있을지 모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을까.
“저라고 걱정이 없었을까요. 하지만 창업을 준비하는 분들께 겁내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철저히 준비하면 되거든요. 청년의 장점은 ‘실패해도 걱정 없을 나이’라는 것 아닐까요. 이게 안 되면 다른 거 준비하면 되잖아요.”
태평전통시장은 호남선 서대전역에서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곳에 있다. 충청과 호남이 만나는 교통 요충지의 이점 덕분에 30여 년 전부터 노점 상인들이 하나둘씩 모이며 형성됐다. 하지만 유통구조의 변화로 대형마트에 손님을 뺏기고 호남고속철도의 오송 분기로 호남과 이어지는 교통의 이점도 퇴색해 살길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용수 상인회장은 “시장에도 경쟁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체계를 잡아야 했다”고 말했다. 올 4월 시장 한쪽에 청년창업자들을 유치해 특화지대 ‘맛it길’을 만들었다. 시설을 현대화하고 홍보를 강화하는 전형적인 전통시장 활성화 대책보다 손님을 끌어모을 수 있는 콘텐츠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동안 시설 개선처럼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정부 지원은 많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거기서 끝이었어요. 소중한 돈을 가지고 마을 잔치에 쓰는 사례들을 보며 ‘시장의 자생력’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먹고, 즐길 수 있는 시장을 만들고 싶었죠. 맛it길은 그런 의미에서 시장과 중소기업청,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의 생각이 모여 탄생했습니다.”
요기조기고기를 비롯해 10곳의 청년창업 점포로 구성된 맛it길이 문을 열자 시장에도 활력이 돌았다. 10여 년간 시장 뒤 후미진 곳으로만 여겨졌던 장소가 이제는 시장에서 가장 늦게까지 불을 밝히는 곳이 됐다. ‘젊은 고객에게 미래가 있다’는 이 회장과 상인들의 판단이 적중했다.
태평시장은 맛it길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 인터넷 입소문을 타고 맛it길에 손님이 몰리는 것을 보고 이 회장과 상인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돈을 들여 광고지와 현수막을 만드는 것보다 잘 만든 SNS 콘텐츠 하나가 파급이 훨씬 컸다”고 말했다. 요즘 그의 페이스북 글에는 300개씩 ‘좋아요’가 붙는다.
취미교실과 100원 경매 같은 특화 콘텐츠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취미교실에선 시장을 찾는 손님과 상인들이 함께 취미를 배운다. 3년 전 시작한 100원 경매는 상인들에게 물품을 기증받아 100원부터 시작해 정가의 절반을 한도로 경매를 진행한 뒤 수익금은 사회취약계층에 기부하는 행사다. 시장의 주요 이벤트로도 자리 잡았다.
이 회장은 “상인들이 움직여야 시장이 변한다”며 “10여 년 전 태평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며 집도 사고 돈도 벌고 싶다는 꿈을 이룬 선배 상인들의 경험을 후배 청년 상인들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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