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시대를 초월해 애송되는 러시아 작가 푸시킨이 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다. 그런데 마치 이 시의 모델인 듯한 여성이 있다. ‘김진디자인’ 대표 김진 씨(46)다.
그는 세 차례의 큰 수술을 받았다. 27세 때 위암으로 위장의 3분의 2를, 5년 전 장 폐색으로 소장 150cm를 잘라냈다. 올해 2월에는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매번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어떤 병마도 일과 골프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진 못했다.
골프는 대표적인 멘털 스포츠다. ‘멘털 갑(甲)’ 김 대표가 골프를 잘 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 왼쪽이 아닌 오른쪽 무릎을 다쳐서 천만다행이다. 이참에 스웨이를 방지하고 왼쪽 다리 축이 확실히 버텨주는 스윙을 하려고 한다. 스코어가 안 좋을 경우에는 인대 파열이라는 핑계가 생겨서 좋다(웃음).”
삶의 태도가 무척 긍정적이다. 골프 실력을 회복한 과정을 보면 불굴의 의지와 실천력까지 겸비했다.
“재활을 마치고 올해 6월 첫 라운드에서 95타를 쳤다. 충격이 컸다. ‘다시는 싱글을 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조급해하지 말고 한 라운드에 한 타씩 줄여 나가자’고. 이후 8차례 라운드에서 연속해서 1타, 2타씩 줄여 84타까지 도달했다. 올해 안에 다시 ‘7자’를 그리는 것이 목표다. 첫 싱글, 홀인원 했을 때도 못 느꼈던 새로운 성취감을 맛보고 있다.”
김 대표의 ‘부활’은 체육대 지망생이었을 정도로 탁월한 운동신경과 체력을 지닌 만능 스포츠우먼이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반대로 체대 진학의 꿈을 접은 김 대표는 대학에 낙방하자 재수를 하는 대신 디자인학원에 등록했다.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예체능에는 두루 소질이 있었다. 그림도 잘 그렸다. 결국 디자이너가 됐고 ‘가지 않은 길’인 체육인에 대한 아쉬움은 골프로 달래고 있는 셈이다.
“디자인과 골프는 비슷한 점이 많다. 그중 하나는 바로 소통이다. 디자인은 발주자와 디자이너, 소비자가 모두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3자가 철저하게 소통해야 한다. 골프도 마찬가지다. 멤버들이 소통을 잘해야 즐겁고 유익한 라운드가 될 수 있다.”
골프는 순간 집중력, 디자인은 단기 집중력이 중요하다. 그래서 골프는 김 대표와 궁합이 딱 맞는 운동이다.
“나는 헬스클럽에는 안 간다. 혼자 하는 운동은 지루해서 못 한다. 골프는 홀마다 새로 시작하는 운동이어서 홀마다 희망을 갖게 하고 지난 홀의 실수를 만회할 수도 있다. 디자인이 바로 그렇다. 이번 작품의 아쉬움은 훌훌 털고 다음 프로젝트를 잘 해내면 된다.”
디자인 회사에 다니다 ‘더 멋진 디자인’에 대한 갈망에 늦깎이로 대학을 마친 김 대표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평생 공감하며 살고 있다. 출판사 ‘푸른숲’에서 북디자이너로 일하던 당시 인생의 멘토 김혜경 대표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고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골프도 그렇다. 운동에 소질은 있었지만 ‘임팩트가 참 좋다’ 등 칭찬을 들을 때마다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2000년에 창업한 그는 회사가 상품디자인까지 영역을 넓히는 바람에 더 바빠졌다. 그러나 다른 일도 꾸준히 벌이며 참가하고 있다. 최근엔 재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활로를 열어주고, 디자이너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디자인협동조합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디자이너 김진의 최종 꿈은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환경보호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로 일하는 것이다. 그 첫걸음으로 ‘내 이름 컵 갖기 운동’(www.namecup.co.kr)을 펼치고 있다. ‘내 이름 컵’은 깜찍하게 디자인한 이름과 문구를 넣은 머그 컵인데,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고. “우리나라에서만 1년에 종이컵 130억 개 이상을 소비하는데, 탄소배출량 기준으로 종이컵 1kg을 안 쓰면 20년생 나무 20그루를 심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김 대표의 디자인 철학과 골프관(觀)은 일맥상통했다.
“디자인은 단순한 장식이나 꾸밈이 아니다. 디자인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더함으로써 사람과 제품, 사람과 기업,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소통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디자인과 골프는 닮은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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