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YS) 정부 시절 현대그룹은 강도 높은 금융 제재를 받았다. 산업은행 시설자금 지원 동결, 해외자금 조달 봉쇄 등 제재 방식도 다양했다. YS 정부는 부인했지만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YS 지지표를 갉아먹은 데 대한 보복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최근 들어 한진그룹이 현대그룹과 비슷한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달 13일 국무회의에서 “한진해운식 기업 운영 방식을 묵인하지 않겠다”며 한진그룹에 대한 제재를 사실상 예고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적극적인 자구 노력을 보여주지 않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직접 겨냥한 비판도 했다.
재계에서는 대통령의 작심 발언이 임종룡 금융위원장 등 ‘모피아(옛 재무부+마피아)’로 불리는 금융 관료들의 ‘작품’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대통령에게 한진해운발 물류대란의 원인이 조 회장과 한진그룹의 ‘부도덕성’이라는 점을 부각시킨 결과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모피아가 물류대란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작업’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실제로 임 위원장은 이달 8일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 청문회에서 “한진해운의 부도덕은 반드시 지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20일에는 금융감독원이 한진그룹 계열사의 재무 상태 점검에 나섰다.
모피아는 그동안 조 회장과 여러 차례 ‘신경전’을 벌였다. 올해 6월 현대상선이 글로벌 해운동맹에 다시 가입하는 문제로 시끄러울 때 조 회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이 시초였다. 당시 모피아는 해운동맹에서 배제된 현대상선을 한진해운이 주축인 ‘더 얼라이언스’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한진해운이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면서 현대상선의 더 얼라이언스 가입이 무산됐다. 모피아 사이에서는 한진해운이 해운동맹 가입을 무산시킨 뒤 정부 지원을 받아 현대상선을 인수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조 회장이 추가로 자구 계획을 제출하라는 채권단 요구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버티는 과정에서도 마찰이 있었다. 특히 ‘해운이 마비되면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도와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조 회장의 ‘벼랑 끝 전술’에 모피아가 애를 태웠다는 후문이다.
올 6월 항로 영업권 등 한진해운 핵심 자산을 ㈜한진이 사들인 것도 모피아가 조 회장에게 반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다. 한진그룹은 한진해운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자산 빼돌리기’라는 게 모피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재계에서는 법정관리로 경영권을 잃은 조 회장에게 책임을 묻는 게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하지만 조 회장이 이번 사태 발생 이후 보인 깔끔하지 않은 태도도 문제라는 점이 함께 존재한다. 특히 자구 계획 제출과 관련해 모피아를 자극한 것이 재계 전반에 역풍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모피아가 물류대란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권이 바뀌더라도 공세를 펼칠 가능성이 높다”며 “이 과정에서 모피아가 여소야대 정국의 경제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해 재계에 대한 군기잡기에 나설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조 회장과 모피아가 어떤 접점을 찾을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평행선을 달리는 한 물류대란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진그룹이 흔들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차하면 한국 경제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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