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은행연합회 손해보험협회 생명보험협회 관계자들은 정부 당국자로부터 ‘특별법에 따라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뜻깊은 자리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라는 암호 같은 전화를 받았다.
공문도 없었지만 각 협회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회원사와 협의해 하나 국민 우리 신한 농협 등 5대 은행이 25억 원씩 총 125억 원, 23개 생명보험사가 총 17억 원, 11개 손해보험사가 총 11억 원을 갹출하기로 했다.
5대 은행이 25억 원씩 갹출
23일 출범한 서민금융진흥원(서금원)은 이렇게 쌓은 자본금으로 설립됐다. 서금원의 주 업무는 복잡한 서민대출상품을 한곳에 묶어 국민이 편리하게 대출받도록 하는 것이다. 대출 절차가 미로처럼 꼬여 있는 만큼 창구를 단일화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꼭 자본금 200억 원에 직원 150명 규모의 새로운 기관을 만든 것이 해답일까.
서금원 출범 당일 “정부가 가장 잘하고 싶은 분야가 바로 서민금융”이라고 한 임종룡 금융위원장의 발언에 힌트가 있다. 서민금융 정책에서 정권 차원의 실적을 내려면 새로운 금융상품을 내놓아야 하지만 이명박 정부 브랜드가 붙은 상품이 너무 많다. 서민대출 시장은 미소금융 햇살론 바꿔드림론 등으로 이미 충분히 복잡하고 포화상태다.
그래서 짜낸 아이디어가 새우깡 꿀짱구 허니버터칩 같은 과자를 ‘맛있는 과자’라는 큰 용기에 담는 식이다. 그 용기가 서금원이다. 이렇게 정부는 서민금융에서 MB 색깔을 지우고 박근혜 정부의 색으로 덧칠하려고 했다. 이런 배경 없이는 공공기관도 아닌 주식회사 서금원의 수장을 대통령이 임명한 장면을 이해할 수 없다.
MB 정부 때 은행들은 미소금융중앙재단에 휴면예금 7000억 원을 출연했을 뿐 아니라 자체 자금으로 은행 브랜드를 붙인 재단도 만들었다. 전 정부에서 거액을 부담할 당시 은행들은 자발적인 출연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은행들은 자발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한 임원의 말꼬리에 진실이 묻어났다. “‘자발적 갹출’은 공식 입장이고 그 속내야 알 수 있나.”
서금원의 모양이 어색한 것은 재단법인이 아니라 주식회사 형태의 특수법인이기 때문이다. 미르 재단이든, K스포츠 재단이든 공익단체는 보통 민법상의 재단법인이다. 돈을 대는 금융회사나 기업들은 재단에 한 번 ‘출연(出捐)’하는 걸로 손을 턴다. 반면 서금원 같은 주식회사에 출자(出資)하면 나중에 증자 등 추가로 돈을 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당국은 은행 측에 추가 증자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7년 전 미소금융 출범 당시 다음 정부에서 서민금융에 또 갹출해야 한다고 생각한 은행은 없었다.
금융위원회는 비정부 인사인 신용회복위원장이 서금원장을 겸직하도록 한 조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서금원에 퇴직 관료를 낙하산으로 보내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원장 자격 요건에 관료 출신을 배제하지 않는 한 금융위 산하 기관에 낙하산이 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믿을 국민은 없다.
정금유착 고리 끊어야
서금원은 옥상옥이다. 단일 전화번호를 통해 모든 대출 상품을 상세히 안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굳이 오프라인의 창구가 필요했다면 이미 전국적인 망을 갖춘 미소금융재단 조직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이런 비효율을 알면서도 정부와 금융권은 침묵했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왜 논란을 만들려고 하는가’라고 묻는 금융계 인사에게 되묻고 싶다. 우리 금융의 생존전략이 겨우 정금유착(政金癒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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