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일본에 머물렀던 고 이병철 당시 삼성물산 사장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그해 7월 의장이 됨)을 만났다. 독대에서 박 부의장은 이 사장에게 △공장을 건립할 것과 △단체를 만들어 정부의 산업정책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전경련의 모태가 된 ‘경제재건촉진회’는 이렇게 발족했다. 경제재건촉진회는 그해 8월 조직의 문호를 개방하며 ‘한국경제인협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1968년에 현재의 전경련이 됐다.
전경련은 설립 초기부터 한국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적 민원을 해결해온 것도 사실이다.
1988년 5공 청문회에서는 전경련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해재단 자금을 주도적으로 모금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전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대비용으로 밝혀진 일해재단을 위해 전경련은 대기업들로부터 1984년 3월부터 4년간 598억5000만 원의 출연금을 받아냈다.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으로 재벌총수의 정경유착이 논란이 되자 전경련은 1996년 기업의 사회적책임 이행, 공정 경쟁 등의 내용을 담은 ‘기업윤리헌장’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1997년 ‘세풍 사건’과 2002년 ‘차떼기 사건’ 등 불법 대선자금 사건 등이 되풀이됐다. 2011년에는 전경련이 삼성, 현대자동차 등 6개 그룹별로 주요 정치인과 대통령실 참모를 배정하고 로비에 나설 것을 요청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군사정권 시절뿐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전경련은 정부의 ‘정책 스피커’ 역할을 했다. 지난해 말 박근혜 대통령이 청년고용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한 ‘청년희망펀드’ 조성을 제시하자 이승철 부회장 등 전경련 임원들이 이 펀드에 1000만 원을 내놓았고, 이어 삼성, 현대차, LG 등 회원사들도 앞다퉈 기부에 동참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미소금융재단’ 설립에도 전경련이 대기업 출연을 주도했다.
이른바 진보정권에서도 전경련은 정부의 의중을 읽는 데 빨랐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에 전경련은 대규모 사업교환(빅딜)의 전면에 나서기도 했다. 정부가 직접 민간기업에 빅딜을 하라고 강제하는 것이 곤란하자 전경련이 자율조정을 자처하고 나섰다. 반도체 사업이 빅딜 대상에 포함됐던 LG그룹은 빅딜 자체를 반대했지만, 정부와 전경련의 압박에 끝내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넘기고 반도체 사업을 포기했다. 전경련은 또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때까지 북한에 쌀과 비료 등 현물을 지원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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