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뷰스]자본시장법, 기본으로 돌아가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4일 03시 00분


송옥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옥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제도를 설계할 때 ‘룰(Rule)’이 좋은가, ‘스탠더드(Standard)’가 좋은가라는 전통적인 논쟁이 있다.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처럼 세세하게 규정을 만드는 게 룰 방식이다. 예측 가능성은 높지만, 막상 잡아야 할 도둑은 놓치기 쉽다. 반면 스탠더드는 두루뭉술한 원칙만 제시하는 방식이다. 단순히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만 정하고 학습 시간, 과목, 참고서 종류 등 구체적인 것은 정하지 않는다. 제도의 취지를 더 정확하게 달성할 수 있지만, 현명하고 효율적인 집행자가 있어야 가능하다. 룰은 사전 규제와 친하고, 스탠더드는 사후 책임과 가깝다.

 청탁금지법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의 입법자나 국민은 여전히 룰 방식에 얽매여 있다. 자본시장법도 그렇다. 자본시장법의 제정은 흩어진 규제를 모으는 것을 넘어 금융투자업의 겸영화 및 대형화를 통해 한국 금융을 선진화하려고 한 시도였다. 포괄주의 방식, 네거티브 규제(최소한의 금지 사항 이외에는 모두 허용)로의 전환은 획기적이란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자본시장의 현실을 보면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금융회사나 감독당국 모두 룰 방식 규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가 있다. 자본시장법 제정 시점에 닥쳐온 금융위기로 투자자 보호 측면이 강조되면서 정책 기조에 혼선이 있었다. 감독당국은 숨은 규제를 이용해 권한을 유지했고, 금융회사들도 창의성을 발휘해 경쟁하는 어려운 길보다 규제에 순응하는 쉬운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현재의 복잡한 사전 규제를 그대로 두고서는 자본시장 선진화를 달성할 수 없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대안은 자본시장법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금융투자업자의 자유와 창의를 장려하려고 한 취지를 되살려야 한다. 그 수단으로는 원칙 중심 규제가 효과적일 수 있다. 금융규제를 스탠더드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법률에서는 일반 원칙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달성 방법은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정하는 것이다. 룰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불확실성으로 인한 혼란이 증가될 뿐이라고 걱정한다. 그러나 원칙 중심 규제는 영국, 일본, 호주 등에서 다양한 형태로 시도되고 있다. 오히려 원칙이 추구하는 목적이 실제로 달성되었는지를 중시함으로써 규제 목적의 달성에 기여하고 있다. 원칙 중심 규제는 금융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더라도 원칙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어 위기 대응 측면에서 더욱 효과적이다. 자율규제가 잘 작동된다면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규제의 자율화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원칙 중심 규제는 규제 철학의 변화를 의미한다. 사전 감독보다 사후 책임 추궁에 방점을 둔다. 감독당국의 사전 승인은 지금보다 줄이되 사후적으로 적발된 문제점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과징금, 영업인가의 철회, 임직원의 징계 등 보다 엄한 책임을 묻게 된다. 금융회사들의 부담은 커진다. 금융회사들로서는 지금처럼 정해진 틀에서 안주하는 것이 더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국제적 거대 금융그룹을 따라갈 수 없다.

 혹자는 한국 금융산업의 현실상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자본시장법 제정으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해서 손놓고 있을 수는 없다. 조금씩 스탠더드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각 경제 주체의 제도 운영 역량을 키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송옥렬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자본시장법#제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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