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뒷골목에 들어서자 녹슨 정사각형 작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인현시장 청년가게 1호, 2호.’ 간판 옆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자 전통시장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간이 나타났다.
약 26m² 크기의 사무실은 아늑한 다락방 같은 느낌이었다. 한쪽 벽면에 회색 패브릭 소파가 있고 바닥에는 비슷한 색깔의 푹신한 러그(작은 카펫)가 깔려 있었다. 반대편의 커다란 책상에선 세 사람이 노트북으로 한창 작업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놓여 있는 일러스트레이션 액자가 이곳이 어디인지 말해줬다. 1일 찾아간 서울 중구 인현시장 내 일러스트 매거진 ‘래빗온’의 사무실은 ‘청춘 예술가들의 아지트’ 같았다.
○ 원하는 대로 맘껏 펼치는 매거진 ‘래빗온’
래빗온은 같은 이름의 일러스트 매거진을 만드는 팀이다. 미술을 전공한 대학과 고교 선후배 사이인 5명이 팀을 이뤄 작업하고 있다. 올 5월 이들이 만든 첫 매거진이 나왔다. 1년에 두 번 정해진 주제에 따라 그린 일러스트로 정기간행물을 발행하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다. 매거진 작업에는 래빗온 외에 외부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참여한다. 조만간 래빗온의 공식 홈페이지가 완성되면 이를 통해 매거진을 온라인으로 판매할 생각이다. 독립서점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마음껏 지껄이다, 떠들다’라는 의미의 래빗온(rabbit on)은 이들이 팀을 만든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름이다. 팀원 모두 대학을 졸업한 뒤 회사에 다니거나 프리랜서로 일러스트 작업을 해왔다.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정해진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삶이 어쩐지 공허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목마름이 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대학 동기였던 손이용(31) 이종환(30) 래빗온 공동대표가 2014년 겨울 의기투합해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모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 대표는 “기존 회사에선 일한 만큼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관뒀다”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순 없지만 최소한 창작물이 존중받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전통시장으로 들어온 청년 예술가들
일러스트 매거진과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이는 전통시장에 래빗온이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은 임차료 등 경제적 지원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지인의 창고를 무료로 빌려 쓰다가 지난해 청년상인 창업지원 사업 공모 소식을 듣고 이곳에 둥지를 틀게 됐다.
인현시장의 지리적 이점도 매력적이었다. 매거진 제작에선 그림을 인쇄하는 작업이 무척 중요하다. 바로 옆 충무로 인쇄소 골목에서 이 모든 작업을 해결할 수 있어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래도 시장에 작업실을 두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을까. 기자의 질문에 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손 대표는 “가끔 우리처럼 예술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전통시장과 어울리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차갑고 딱딱한 도시적 분위기보다 부드럽고 인간미 넘치는 시장이 창작을 위한 영감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며 웃었다.
시장의 일원이 된 만큼 래빗온도 기존 상인들과 상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근 인현시장을 홍보하는 동영상을 만들 때 래빗온이 일러스트 작업을 맡았다. 젊은 사람들을 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안으로 ‘드로잉 클래스’ 개설도 고민하고 있다. 이 대표는 “취미로 그림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초적인 클래스를 열고 이들이 그린 그림을 소품으로 만들어 주는 등 다양한 방안을 구상 중”이라며 “래빗온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예술이 목표”
래빗온은 아직 수익구조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5월에 만든 매거진도 문화후원형 크라우드펀딩(인터넷으로 일반인들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것)을 통해 모은 지원금으로 제작했다. 일러스트를 활용한 머그컵, 노트 등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어 파는 것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손 대표는 “현재 팀원들이 각자 프리랜서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데 빨리 이런 부업을 하지 않아도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래빗온’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아트워크(예술작품활동) 플랫폼’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래빗온의 콘텐츠를 다양한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물건을 살 때 제품의 기능과 가격만 따지던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는 그 상품에 담긴 가치를 구매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예술이 일상과 괴리된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소비하는 가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손 대표는 “예술도 의식주처럼 사람이 행복해지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면서 “우리가 가진 재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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