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된 아기예요. 침대는 가로 2m, 세로 1m 정도 된답니다. 범퍼 견적이 어떻게 나올까요?”
11일 오전 경기 성남시 제일로 성남중앙시장에서 만난 김도희 연희데코 대표(22·여)의 모바일 메신저는 전국의 아기엄마들이 보내온 견적문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이들이 찾는 건 연희데코의 대표 상품 ‘범퍼 가드’. 아기 침대 사방을 두를 수 있는 범퍼형 쿠션으로 낙상사고를 막을 수 있는 데다 연희데코에서 원하는 크기로 맞춤 제작해줘 인기있다. 이날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 들어온 메시지만 8건. 인터뷰 도중에도 들어오는 문의에 김 대표는 “그래도 저희 제품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행복해요”라며 웃었다. ○ “중앙시장은 내 고향” 시장소녀, 사장이 되다
김 대표는 시장소녀다. 그의 외할머니가 1970년 성남중앙시장에 문을 연 연희데코의 모체 ‘오복상회’가 집이었고 시장 골목은 놀이터였다. 2000년 어머니 고백연 씨(55)가 가게를 물려받아 ‘중앙이불커텐’으로 상호를 바꾼 후에도 그는 ‘이불집 딸 김도희’였다. 재봉틀 소리와 갓 나온 원단 냄새가 어릴 적 가장 익숙한 친구였다.
가업을 물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또래처럼 대학에 진학해 취업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2012년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을 시작했지만 ‘미래’를 찾을 수 없었다. 남들과 똑같이 영어를 공부하고 기업에 취직하거나 공무원이 되는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한 대학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그해 여름 휴학계를 던졌다.
어느 날 일을 도울 생각에 가게에 나와 있던 김 대표에게 신근식 성남중앙시장 상인회 부회장(56)이 “상인대학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전통시장 상인들에게 기본적인 영업 기법은 물론이고 기업가 정신을 일깨워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엔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하며 들어갔던 곳에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만났다.
“8월 한 달 과정의 강의를 듣고 ‘이거 왠지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익숙했던 곳이 시장이고 어깨 너머로 봐온 것도 장사였고요. ‘연희데코’ 블로그를 시작한 것도 여기서 결심했답니다. 어머니와 제 이름의 뒷글자를 하나씩 따 연희데코라는 새 이름도 만들었고요.” ○ 일기 쓰듯 쓴 블로그, 히트작 ‘범퍼 가드’ 탄생
연희데코 블로그는 1만2000여 명의 이웃을 둘 정도로 인기있다. 흔한 상업광고 하나 없이 입소문으로 일군 연희데코만의 자랑이다. “엄마와 딸이 수예점을 동업하며 직접 제품을 만들어 파는 이야기를 담았다”고 김 대표는 소개했다. 제품 소개가 아닌 그저 가게를 꾸리는 소소한 이야기라도 하루에 하나씩 담았다.
블로그를 꾸린 지 1년 반이 흘렀을 즈음, 김 대표는 운명을 만났다. 지금의 연희데코가 있게 한 ‘범퍼 가드’를 한 블로그 이웃이 의뢰했던 것. “아이가 낙상 걱정 없이 침대에서 자유롭게 구를 수 있도록 2m 길이로 침대를 두를 수 있는 쿠션 벽을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해보지 않았던 분야였기에 고민했지만 이웃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해보자”고 결론을 냈다.
입소문은 엄청났다.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도 범퍼 가드를 팔았지만 규격화돼 있어 다양한 형태의 제품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 저출산 시대를 맞아 “내 아이에게는 아낌없이 쓴다”는 부모들이 연희데코의 문을 두드렸고 주문은 밀려들었다. ‘틈새시장’을 개척한 것이다. 김 대표도 전국의 육아용품 전시회를 둘러보며 시장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 어엿한 경영인… “소중한 경험 나누고 싶어요”
김 대표는 내친김에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왕 가게를 맡았으니 제대로 꾸려 보기 위해서다. 내년 봄에는 3학년 1학기로 복학해 학업과 가게살림을 병행할 계획이다. 범퍼 가드가 잘 팔리며 공장도 마련하고 손재주 좋은 직원 8명도 고용했다. 연희데코를 사칭한 가짜 상품(짝퉁)이 인터넷 중고장터에 등장하자 상표 등록도 준비하고 있다.
연희데코를 꾸린 지 어느덧 4년 반. 김 대표는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손님을 상대하는 것부터 품질을 신경 쓰고 직원을 고용하는 것까지 직접 익힌 경영비결을 또래 청년상인 후배들과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어머니 고 씨에게도 김 대표는 좋은 동업자이자 든든한 딸이다. 고 씨는 “딸이 직접 가게를 꾸리고 키우는 모습이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이제는 대견하다.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하며 고생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럽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즐기는 모습에 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곤 한다”고 자랑했다. 김 대표의 꿈은 연희데코를 가게가 아닌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범퍼 가드는 시작일 뿐이다.
“흔히 20대가 가게를 꾸린다고 하면 값싼 물건을 가져와 대량으로 파는 걸 떠올리고는 해요. 하지만 많은 창업 지원정책이 있고, 과거와 달리 온라인에서 창업 선배들의 경험을 들을 수 있지요. 손님들의 솔직한 제품 사용 후기는 큰 힘이죠. 반세기 전 할머니가 쓰기 시작해 어머니께 물려주셨던 가위와 함께 연희데코를 제대로 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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