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겨울 어느 날, 문경연 씨(37)는 회사 후배 신혜림 씨(28)의 말에 ‘참 이상한 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술이 그냥 술이지 술을 알고 마시고 싶다니. 알고 마시든 모르고 마시든 결국 취하긴 매한가지 아닌가.
생물학을 전공한 문 씨와 동물생물학을 전공한 신 씨는 서울의 한 유전자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였다. 막내 축에 속했던 신 씨는 염색체 샘플을 들고 뛰어다니며 심부름을 자주 했고, 문 씨는 샘플을 받아 진단키트로 태아 염색체에 이상이 있는지를 분석했다. 일 처리가 빠릿빠릿하고 한 번 맡은 일은 끝장을 보는 성격의 야무진 신 씨와 친언니같이 포근하고 자상한 성격의 문 씨는 오래지 않아 친해졌다.
주량이 소주 2병을 넘기는 신 씨는 틈만 나면 “언니, 술 사줘요”하며 문 씨에게 전화를 걸었고, 소주 반병을 채 못 비우는 문 씨는 그때마다 술친구가 됐다. 그때만 해도 서로가 평생의 사업 파트너가 될 줄은 몰랐다. ○ 술은 과학이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 막걸리를 좋아했던 신 씨는 2011년 입사한 뒤 새로운 술의 경지를 접했다. 회식 때마다 양주, 보드카, 칵테일이 속속 등장했다. 호기심이 많았던 신 씨는 옆 동료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동안 술잔을 보며 남다른 생각을 했다.
‘세포도 키우려면 여러 영양소를 잘 배합해 공급해야 하는데 칵테일도 여러 술을 잘 조합해야 좋은 맛이 나는구나. 그러므로 술은 과학이다.’
그때부터 신 씨는 오후 6시 회사를 나서면 독서실로 직행했다. 술 제조법, 술의 역사 등을 담은 책을 쌓아 놓고 서너 시간씩 공부했다. 반년 동안 술에 관한 온갖 지식을 텍스트로 빨아들였지만 실전 감각이 아쉬웠다. 신 씨는 여유 시간에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어떤 요리에 어떤 술이 잘 맞는지, 혼합주는 어떻게 만드는지 어깨 너머로 보며 익혀갔다.
머리와 몸으로 술 지식을 체득한 신 씨는 직접 술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맛보여 주고 싶다는 욕망에 손이 간질간질했다. 수중의 돈을 모아 보니 32만 원. 좌고우면하지 않는 성격의 신 씨는 칵테일 재료와 조그만 식탁을 사서 2014년 10월 집 근처 공원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한 잔에 3000원 균일가. 칵테일 셰이커(혼합기)를 좌우로 흔드는 신 씨의 모습을 신기하게 여긴 동네 주민들이 한 잔, 두 잔 맛을 보곤 “맛있네, 처자!”를 연발했다.
무허가 노점이었지만 손님이 늘며 일손이 딸리기 시작했다. 신 씨는 문 씨에게 ‘언니, 날씨도 좋은데 공원에 놀러와요’라며 달콤한 메시지를 보냈다. 문 씨는 “착한 우리 동생이랑 산책이나 할까” 하며 공원을 찾았다. 당시 문 씨는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문 씨는 “몸도 마음도 지쳐 휴식이 필요해 외국에 나가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날 공원 산책을 나왔던 문 씨는 신 씨 옆에서 함께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신 씨는 창업의 고민을 문 씨에게 털어놨고 문 씨는 “내가 밀어줄게, 해봐”라며 어깨를 두드렸다.
‘꿈을 담은 칵테일’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 첫 케이터링에서 매장 오픈까지
그러던 중 그해 11월 첫 ‘케이터링(Catering·출장서비스)’ 의뢰가 들어왔다. 한 손님이 “우리 산악회 회원들이 성탄 전야에 강원도로 1박 2일 산행을 가는데 그곳에 와서 차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부푼 마음에 긴 고민 없이 ‘1인당 2만 원’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강원도 배달을 위해 두 사람은 차랑공유서비스 업체에서 아반떼 한 대를 빌렸다. 술과 안주도 풍성하게 준비했다. 눈비가 쏟아지는 성탄 전야 두 사람은 강원도 한 캠핑장에서 손님들에게 잊지 못할 칵테일파티를 선사했고, 다음 날 돌아와 정산을 했다. 받은 돈은 30명 분 60만 원. 쓴 돈은 렌트비, 재료비 등 총 200만 원. ‘마이너스 140만 원’이었다.
11일 오후 인천 부평구 부평로터리지하상가 내 매장에서 만난 신 씨와 문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의욕이 넘쳐 손해를 봤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며 웃었다. 두 사람은 그날의 값진 경험 때문에 지금의 성공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 씨는 “집중할 수 있는 한정된 메뉴를 만들어야 한다, 술 도수가 너무 높으면 벌칙주로 쓰인다 등의 교훈을 그때 얻었다”고 말했다. 지갑은 가벼워졌지만 당시 서비스를 좋게 본 손님들이 여기저기 입소문을 냈다. 맛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친절한 인성’도 소문이 났다. 주문이 밀려들었고 더 이상 ‘공원 노점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 사이 신 씨는 정식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매장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신 씨가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문 씨가 “창업지원제도가 있을지 모르니 알아보자”고 조언했다. 때마침 부평구청은 부평로터리지하상가에 입점할 청년창업자를 모집하고 있었다. 선정되면 임대료 없는 점포가 주어졌다. 두 사람은 응모해 점포를 따냈고 창업지원금 200만 원도 받았다. 난생 처음 톱질과 페인트칠로 한 달을 꼬박 보낸 끝에 지난해 5월 30일 ‘꿈을 담은 칵테일’ 오프라인 매장이 문을 열었다. ○ 두 청춘, 시니어와 함께 꿈꾸다
현재 신 씨는 칵테일 제조, 외부 교육 등을 맡고 있다. 푸드스타일리스트 자격증을 딴 문 씨는 음식 준비와 코디네이터 일을 맡고 있다. 그리고 7월에 합류한 ‘30년 주부 손맛’ 이순희 씨(62)가 있다.
막상 매장을 여니 신 씨와 문 씨의 예상과 달리 인근의 유동인구는 젊은층이 아니라 노년층이 더 많았다. 두 사람의 칵테일바는 점차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방’이 되어 갔다. 자식 손주 모두 품을 떠난 나이. 무료한 일상에 어르신들은 3000원 칵테일 한 잔을 시켜 놓고 둘러앉아 인생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만드느냐, 배우고 싶다”며 제조법을 묻는 어르신도 있었다. 신 씨는 점차 문의가 늘어나자 아예 칵테일 제조법 수업을 열었다.
이 씨도 처음에는 손님이었다. 그러다 칵테일 수업 중 이 씨의 야무진 손놀림과 빼어난 음식 솜씨를 주목한 신 씨와 문 씨가 합류를 제안했고 이 씨가 흔쾌히 응했다.
두 사람은 이 씨의 합류를 통해 또 다른 꿈을 꾸게 됐다. 신 씨는 “우리 가게가 부평지역 노인 분들의 일자리 통로가 되었으면 한다”며 “정말 ‘재밌어서 하는 일’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시니어 파티플래너, 시니어 바텐더 등의 영역으로 넓혀 갈 구상도 하고 있다.
칵테일 제조로 시작했던 창업은 이제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과학놀이체험과 케이터링을 조합한 서비스도 시작했다.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칵테일 강좌도 상반기, 하반기로 나눠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외부에서는 ‘술 인문학’ 강의 의뢰도 들어와 신 씨가 강의에 나서고 있다.
신 씨와 문 씨는 창업을 꿈꾸는 또래 청년들에게 “창업을 하다 실패하면 마음, 이력, 돈 모두 잃는다”며 “당장 성과나 매출이 안 나와도 버틴다는 각오가 있어야 결실을 볼 수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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