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트러스트’에서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저자는 한 나라의 경제는 규모와 문화적 요인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문화적 요인은 ‘신뢰’가 바탕이 된 ‘사회적 자본’이라고 그는 역설했다. 폭넓게 구축된 신뢰가 사회적 자본으로 축적돼 한 나라의 경제 규모와 신뢰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9월 28일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은 한국 사회 전반에 신뢰를 구축하자는 취지로 발의됐다. 이틀 뒤 시행된 ‘보험사기방지 특별법’ 역시 보험회사와 보험가입자 간 신뢰 구축을 근간으로 한다. 보험사기로 인한 피해 규모는 2014년 한 해 약 4조5000억 원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선량한 보험가입자의 보험료를 상승시키고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것이다.
청탁금지법과 보험사기방지 특별법은 사회적 신뢰 구축과 비용 절감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보험사기방지 특별법의 영향을 시민들이 피부로 느끼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보험업계에서는 보험사기 예방 효과가 예상보다 빨리 나타날 것이란 기대가 크다.
최근 일본의 손해보험협회장과 업계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법이나 제도 개선을 검토할 때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 보험사기 문제는 거꾸로 일본 관계자들이 우리의 방지대책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본도 보험사기 증가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현재 관련 대책을 다각도로 마련하고 있다. 필자가 만난 일본 손해보험업계 관계자들은 한국의 국회, 정책감독 당국, 경찰청, 보험업계가 공동으로 노력하는 점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했다. ‘신뢰 사회’로 널리 알려진 일본이 한국의 보험사기 방지대책을 벤치마킹하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것을 보며 신뢰를 통해 사회적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느꼈다.
얼마 전 언론 보도를 통해 믿기지 않는 기사를 접했다. 한 병원에서 ‘보험회사 돈은 눈먼 돈’ ‘보험회사는 우리의 밥’이라고 적힌 메모를 책상에 붙여놓고 허위 입원 환자를 유치해 요양급여를 편취했다는 기사였다.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해당 병원장은 ‘수사에 협조하지 말라’는 취지의 문자메시지를 환자들에게 보내고 수사관의 질문에 답변할 내용까지 작성해 배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만인을 위한 신성한 보험정신이 훼손되고, 보험산업이 희화화되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이 같은 인식이 남아있는 한 보험사기방지 특별법의 실효성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보험사기 피해는 모든 보험 가입자에게 돌아간다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사전예방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보험사기 가능성을 미리 알아내고, 가입 단계부터 각종 업무 데이터를 기반으로 예방 시스템을 정교화해야 한다.
앞으로 한국의 저성장 기조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답습하지 않고, 견고한 재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신뢰를 기반으로 한 투명화, 정상화의 과정이 지속된다면 보험사기방지 특별법이 올바르게 적용될 발판이 마련될 것이다. 이는 ‘보험 소비자 보호’라는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긍정적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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