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과 단둘이 살고 있는 김모 씨(66·여)는 최근 단골 은행 직원에게 걱정거리를 털어놓았다. “최근 건강이 나빠졌는데 무슨 일이 생겨 강아지가 혼자 남겨질까 봐 잠이 안 와.”
이 얘기를 들은 은행 직원은 ‘펫(pet·반려동물)’ 신탁 상품을 권했다. 고객이 사후에 강아지를 길러줄 사람을 지정해 돈을 맡기면 은행이 나중에 이 돈을 해당 부양자에게 건네주는 상품이다. 김 씨는 곧장 상품에 가입했다.
시중은행들의 ‘신탁(信託)’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저금리 환경에서 새로운 수익 사업을 찾아 나선 은행들과 고령화 시대에 자산 관리 수요가 맞물린 결과다. 신탁은 ‘믿고 맡긴다’는 뜻으로, 고객이 은행에 돈이나 부동산 등을 맡기면 해당 은행이 알아서 이를 운용하거나 관리해 주는 방식이다. ○ 신개념 신탁 상품 잇달아
지난달 펫 신탁 상품을 처음 선보인 KB국민은행은 22일 가입 대상을 개에서 고양이로 확대했다. 공승찬 국민은행 신탁부 팀장은 “고양이 애호가들의 문의가 많아서 상품을 확대했다”고 말했다.
KEB하나은행은 부모를 잃고 미성년 자녀들만 남는 경우를 대비한 ‘재산 지킴 신탁’과 치매 등 정신적 질환을 대비한 신탁 상품을 다음 주 내놓을 계획이다.
신한은행(내리사랑신탁)과 우리은행(명문가문증여신탁)도 올해 하반기부터 가입자가 사망하면 계약(유언) 내용대로 자산을 분배, 관리하는 유언 대용 신탁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배정식 하나은행 신탁부 센터장은 “고액 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신탁 상품이 최근 다양한 연령층과 자산을 가진 고객을 위한 상품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의 신탁 잔액도 빠르게 늘고 있다. 국민 신한 우리 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신탁 잔액은 올해 10월 말 현재 178조 원으로 지난해 말(158조 원)보다 13% 늘었다.
○ “관련 규제 완화되면 시장 더 커질 것”
금융당국도 은행권의 신탁 사업 확대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관련 제도 개편에 나섰다.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시중은행들과 신탁 상품 규제 완화 등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가동했다.
은행들은 금융위에 현재 금지돼 있는 개별 신탁 상품의 광고를 허용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품을 만들어도 알릴 수 없어 영업이 어렵다는 게 이유다. 한 은행 관계자는 “유언 대용으로 주식을 신탁했을 때 의결권 행사 제한 등의 요건이 있는데 이 또한 풀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관련 규제가 완화되고 다양한 상품이 등장하면 고객들의 선택권도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고령화, 저성장 시대를 맞아 맞춤형 신탁 상품이 나오면 은행은 수수료를 벌고 고객은 자산 관리 수단이 많아져 ‘윈윈’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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