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삼성전자가 지주회사 전환을 거론한 것은 더 이상 지배구조 개편을 시기적으로 미룰 수 없다는 내부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초 삼성그룹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 이후 올해 안에 체제를 정비한 뒤 내년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삼성전자 지주회사 전환 등의 추가 작업을 진행한다는 계획표를 짜놓고 있었다. 예기치 못했던 국정조사와 특별검사 여파로 경영계획 등에는 차질이 생기고 있지만, 지배구조 개편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상법 개정안 등이 발의돼 있어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지 않은 데다 삼성전자로서는 때마침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주주제안 덕분에 좋은 명분이 생긴 상황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 지주회사 전환 효과
삼성그룹이 2013년부터 진행해 온 지배구조 개편 작업의 ‘대전제’는 이재용 부회장 및 특수관계인의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 강화다. 삼성전자가 그동안 자사주를 꾸준히 매입해 지분 12.78%(9월 말 보통주 기준)를 확보한 것도 이런 작업의 연장선상으로 해석된다.
금융투자업계는 현재 삼성전자의 주당 가격이 160만 원이 넘는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면 현재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 0.59%에 불과한 이 부회장이 승계에 필요한 추가 지분을 모두 사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 때문에 회사를 인적분할한 뒤 지주회사로 설립하는 구조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지주회사 전환을 위해 가칭 ‘삼성전자 투자회사(홀딩스)’와 ‘삼성전자 사업회사’로 분할할 것으로 보인다. 향후 투자회사가 사업회사 지분을 공개매수하고 그 대가로 부동산이나 특허권 등을 현물로 출자하는 방안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더 나아가 투자회사를 삼성물산과 합병시키면 대주주 의결권을 40%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거론된다”고 말했다. 삼성물산과 삼성전자 투자회사가 합병하게 되면 삼성그룹 전체의 지주회사 체제가 완성된다. 이 부회장과 특수관계인이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구조가 그려지는 셈이다.
하지만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현재까지 내부적으로 정한 방향은 삼성전자를 지주회사로 전환한다는 것”이라며 “추후 이어질 지배구조 과정에서 삼성물산이 어떻게 활용될지에 따라 전체적인 방향은 또 바뀔 수 있다”며 지주회사 전환 이후의 시나리오에 대한 확대해석은 경계했다.
○ ‘최순실 게이트’ 와중에 왜?
재계에서는 지주회사 전환을 촉진했던 현행법이 개정되기 전에 삼성이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회사를 분할할 때 자사주에 대해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삼성전자 투자회사’가 ‘삼성전자 사업회사’ 주식을 보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이 법이 통과되면 인적분할을 통한 대주주 지배력 강화의 길이 어렵게 된다. 지주회사 전환 전에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발의된 상태다. 지주회사로 전환할 때 과세 부담을 줄여주는 과세 특례가 2018년 12월까지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경제민주화를 추구하는 야당이 국회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어 지주회사 전환을 촉진하는 각종 법안이 유지되기 어려운 환경으로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계에서는 삼성그룹이 제조부문은 삼성전자 인적분할 후 지주회사 전환 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금융부문은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 금융지주회사 전환 작업을 가시화할 것으로 내다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전자의 지주회사 전환 검토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다만 지주회사가 되려면 상장 자회사 지분 20% 이상(비상장은 40%)을 확보해야 하는 만큼 지분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공정위 관계자는 “지주회사 전환 시점에 행위제한규정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더라도 2년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며 “추후 상황에 따라 추가로 2년이 더 주어진다”고 말했다.
이날 유가증권 시장에서 삼성전자 주가는 보합세를 보이며 전날 종가와 같은 167만7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거래량은 전날보다 약 32.8% 증가했다. 이번 발표가 삼성전자의 기업 가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투자자들의 판단이 엇갈리는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 삼성물산은 전날보다 8.63% 하락한 12만7000원에 마감했다. 삼성이 즉각적인 지배구조 개편에 들어갈 것이란 예측과 달리 최소 6개월간 검토 기간을 거치기로 하자 실망 매물이 쏟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전날 지배구조 개편 기대감에 3.73% 올랐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인적분할 ::
분리되거나 신설된 새 기업의 주식을 분할 전 기업 주주들이 소유한 주식 지분대로 소유하는 기업 분할 방식.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