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여름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 경제 저널리즘 세미나에서 다른 나라 기자들에게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한국에서 있었던 금 모으기 운동에 대해 들려준 적이 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 이어 ‘유럽 재정위기’의 두려움이 세계 금융시장에 짙게 깔려 있을 때였다.
방만한 재정 운영으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당시 남유럽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에선 실직자들이 급증했다. 형편이 어려워진 국민들은 “거리의 비둘기마저 배를 곯는다”고 한탄했다. 남유럽 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숙자와 실직자들이 “살려 달라”고 절규하던 서울 거리가 떠올랐다.
당시 외환위기로 달러가 모자라자 한국인들이 장롱 속의 금붙이를 자발적으로 들고 나와 경제 재건에 보탰다는 얘길 꺼낸 건 “한국인들이 대단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국민적 단합이 필요하다는 걸 훈수랍시고 했는데, 남유럽 기자들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
“국가가 잘못한 걸 국민들이 왜 책임져야 해?”
그들은 우리에게 그런 일을 기대하진 말라고 되받아쳤다. 개인의 사적 영역과 국가 사이에 단단히 울타리를 두는 서구인의 시각에서 금을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국가를 위해 내놓은 한국인들을 이해할 순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남 얘기하듯이 위기의 책임을 무능한 정부에 돌리고 탐욕스러운 미국 금융인 탓을 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다시 닥친다면 그때처럼 온 국민이 합심해 ‘금 모으기’ 운동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외환위기 전만 해도 ‘나라에 좋은 일이 나한테 좋다’는 국민적 믿음이 있었다. 맨주먹으로 가난을 이겨낸 성공에서 얻은 자신감이자, ‘한강의 기적’이 준 선물이었다. 난파선처럼 침몰하는 한국 경제를 구해낼 수 있다면 장롱 속 결혼반지쯤 내놓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국민들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도 쉽게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살려낸 한국 경제가 금 모으기 운동에 제대로 된 ‘애프터서비스(AS)’를 해주진 못한 것 같다. 나라 곳간에 달러가 다시 차고, 대기업들이 더 큰 돈을 만지게 됐지만 국민들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중산층이 얇아지고, 가계부채는 급증했다. 팍팍한 삶은 세계 최고의 자살률로 나타났다. “삼성, 현대자동차에 좋은 것이 한국에도 좋다”는 자부심도 희미해졌다.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단하고, 대기업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돈을 헌납하는 정경유착의 구태를 보며 국민들은 있는 금도 장롱 속에 더 깊이 감추고 싶을지 모른다. 최근 만난 한 전직 장관급 인사는 “혼란 속에서 국민을 생각하는 국가 지도자는 보이지 않고 제 이익만 챙기려는 계파 지도자만 넘쳐난다”고 한탄했다.
경제는 노동과 자본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같은 자원을 투입해도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없으면 허실이 많다. 당장 누가 대권을 쥐느냐보다 앞으로 추락한 국민의 신뢰를 어떻게 회복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쓰러진 법과 원칙을 다시 세우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공정한 기회의 문을 활짝 여는 것이 위기 극복의 첫 단추다. 그것이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과, 주말을 반납하고 광화문광장에 모인 수백만 ‘촛불 민심’을 제대로 AS해 주는 길이다. 경제도 그래야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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