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진흡]한진해운 ‘징비록(懲毖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15일 03시 00분


송진흡 산업부 차장
송진흡 산업부 차장
 며칠 전 고등학교 동기인 A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대상선이 글로벌 해운동맹인 ‘2M’에 가입하는 것이 사실상 무산됐다는 외신 보도를 접한 직후였다. 한진해운 부장인 A가 배경을 잘 알 것 같아 연락을 했지만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 회사에서 잘렸다. 회사도 곧 청산될 것 같다. 한국 해운산업도 이제 끝이야.”

 A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정부가 뭘 했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정권에 밉보인 한진그룹에 ‘괘씸죄’가 적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최근 한진해운 실직자들 사이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 씨가 주도한 미르재단에 한진그룹이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내 불이익을 당했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이들은 올해 9월 13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 발언을 주목하고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한진해운식 기업 운영 방식을 묵인하지 않겠다”며 한진그룹에 직격탄을 날렸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직접 겨냥한 비판도 했다.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특정 기업이나 기업인을 상대로 비판을 쏟아내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진해운 내부에서도 물류대란이 빚어지고 있던 비상 상태였던 만큼 적극적인 자구 노력을 보여주지 않은 조 회장을 압박하는 차원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올해 10월 말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면서부터. 검찰 수사로 한진그룹이 최순실 관련 재단에 돈을 내는 문제로 청와대와 마찰을 빚은 사실이 알려졌다. 조 회장이 청와대 압력으로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난 것도 뒤늦게 밝혀졌다. 이후 한진해운 실직자들은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에 다른 맥락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한진해운이 무너진 것과 관련해 실체적 진실이 밝혀진 것은 없다. 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한 검찰도 제한된 수사 기간 때문인지 이 문제와 관련된 의혹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한진해운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의혹이 진실에 부합하는지를 논하기는 너무 이르다. 해운산업 특성을 모르는 금융 관료들의 아집이 주된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현대상선을 인수하기 위해 정부와 신경전을 벌였던 조 회장의 욕심이 한진해운을 나락으로 이끌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진상 및 책임 소재 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한 한국 해운산업의 기반을 흔든 ‘한진해운 사태’와 같은 비극이 조선이나 철강 등 구조조정이 진행 중인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언제라도 정치권이나 관료, 재벌 총수가 구조조정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검찰 수사가 끝난 만큼 이제 진상 및 책임 소재 규명의 열쇠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쥐게 됐다. 한진해운 사태는 ‘최순실 일당’이 대기업 손목을 비틀어 돈을 뜯어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후폭풍이 컸다. 특검도 이 문제를 들여다볼 가능성이 높다. 

 재계에서는 이번 특검 수사에서 대통령 연루 의혹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수사 과정에서 금융 관료나 조 회장의 잘못이 드러나면 최소한 추가 청문회 개최 등 한진해운 사태 ‘징비록(懲毖錄)’을 쓸 수 있는 토대는 마련된다는 점에서다. 특검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산업 분야 구조조정의 성패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
#한진해운#조양호#최순실#미르재단#최순실 게이트#징비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