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범 전 대통령정책조정수석은 박근혜 정부 초반 관료들에게 “대통령의 인사 풀이 수백 명은 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인사 때 박근혜 대통령이 잘 모르는 사람을 자주 거론하자 ‘수첩 인사’라는 비판과 달리 대통령의 인맥이 넓다고 귀띔한 것이다. 그러나 안종범은 그 인사 풀이 최순실 인맥임을 알아챈 순간 살길을 모색하다 죽는 길로 들어섰다.
금융 인사 복마전 시작됐다
인사를 주무른 실세 권력이 낙마한 지금이 인사를 정상화할 수 있는 기회라는 시각도 많다. 하지만 ‘신의 직장’이 넘쳐나는 금융권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은행장 후보들이 자기 좀 뽑아 달라며 발에 불이 나게 뛰고 있다. 그 수법이 은밀하고 우회적이어서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에 걸릴 일도 없다.
최근 IBK기업은행장 후보로 나선 내부 인사가 고위 관료에게 인사 청탁을 했다고 노조가 주장하자 금융위원회가 해명자료를 냈다. 정치권에서는 후보자의 과거 이력을 두고 의혹을 제기하는 판이다. 이런 아수라장은 내년 1월 기술보증기금 이사장, 3월 한국수출입은행장, 4월 농협금융지주 회장 인선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은행은 최근 민영화에 성공했다지만 정부가 여전히 20%의 지분을 갖고 있는 만큼 3월 주주총회까지 복마전이 이어질 것이다. 청와대 국가정보원 경찰 등이 동원된 인사 검증도 종전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인사 청탁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도 민원서류가 고위 관료 책상에 쌓이는 현 상황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청탁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 고리는 일시적으로 훼손되더라도 금방 재생될 만큼 복원력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최근 만난 전직 고위 관료의 말은 인사 청탁이 ‘밑져야 본전’ 차원이 아니라 인선의 결정적 요소임을 시사한다.
“인사 때마다 민원이 사방에서 날아옵니다. 그런 청탁으로 들어오는 후보자들 중 제대로 된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데 그런 함량 미달인 청탁자들이 결국 고위직을 차지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풀이하자면 정치권과 청와대에서 날아오는 민원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자의 청탁이 마지막 순간에 통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낙하산이 그렇게 많았던 이유를 알 만하다. 금융개혁을 외쳤는데 은행 경쟁력이 우간다 수준에 머문 배경도 납득이 된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아놨으니 당사자인 금융기관장은 정권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어깨띠 두르고 서민금융 가두캠페인을 하거나 김장행사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현장 소통이라고 포장하지만 최고 권력자에게 보내는 ‘윙크’였다. 경쟁력 강화 방안이라고는 직원 대상의 친절교육이나 기업인과 폭탄주 마시며 대출 규모를 늘리는 게 고작이었다.
은행원들이 인사 철에 친인척까지 동원해 고위층에 로비하는 것도 이런 학습의 효과다. 부하 직원이 정치인을 들먹이며 인사 민원에 나서면 은행장이 ‘인맥이 넓은 직원’이라고 평가했다니 윗물과 아랫물이 모두 썩었다.
직원까지 정치인 동원해 민원
은행장들의 연봉은 10억 원이 넘는다. 이 보수가 금융 발전에 기여하는 정당한 대가라면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이 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의 주장이다. 보상은 클수록 동기부여에 좋지만 처벌도 단호하고 엄중해야 한다. 은행장들이 경영 실패에 책임졌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저명한 금융 전문가에게 ‘지금 은행장 중 자리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그는 주저하지 않고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금융 빅뱅은커녕 돈을 제대로 빌려주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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