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저 같은 26세 학생이 창업 비용과 시제품 제작비를 마련하기는 어렵죠. 그래서 들어왔습니다.”
지난해 12월 13일 덴마크 코펜하겐 외곽에 있는 덴마크공과대(DTU) 내 ‘DTU스카이랩’에서 만난 마르틴 닐센 씨는 두꺼운 끈이 꼬인 모양의 금속케이블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DTU스카이랩은 학생 창업을 장려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닐센 씨는 전공지식을 살려 알루미늄과 구리를 조합하는 기술로 케이블 제작 비용과 시간을 크게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곳의 지원에 힘입어 2015년 전력케이블 개발 업체 ‘렐리본드’도 창업했다. 여러 기업으로부터 제작 의뢰를 받는 등 성공적인 학생 스타트업으로 키워가고 있다.
이곳 책임자인 미켈 쇠렌센 씨는 “2015년에만 112개 팀이 상담과 도움을 받았고 그 수는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 대학에 스타트업 모아 비용 아끼고 노하우 교환
전통적으로 조선부품 산업이 강세였던 덴마크는 하이테크와 정밀기계, 바이오, 디자인 분야의 뛰어난 강소기업이 많지만 4차 산업혁명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의 종주국이자 제조업 최강국 독일이 옆에 있고, 같은 북유럽권에서는 핀란드와 스웨덴이 정보기술(IT)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IT 강국 중 하나이면서도 중국이나 일본 등 훨씬 큰 강자들에 둘러싸여 입지가 약해지고 있는 한국과 비슷한 처지인 것이다.
독일에 비해 대기업이 많지 않은 덴마크는 중소기업이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할 역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걱정이다. 네트워크가 약하고 3차원(3D) 프린터를 비롯한 첨단 장비를 마련할 재원도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덴마크는 대학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기술 수준이 앞선 대학에 스타트업을 모이게 해 비용을 절감하고 혁신 역량을 자극하는 것이다.
덴마크의 스타트업 허브 중 가장 큰 곳은 DTU가 운영하는 ‘사이언 DTU’다. 사이언 DTU는 엄밀히 말하면 스타트업들에 공간을 제공하고 임대료를 받는 부동산 임대업체이지만, 수익보다는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것이 주 역할이다. 펀드 형태로 1962년부터 존재하긴 했지만 지금 같은 형태로 활성화된 것은 2004년부터다. 사이언 DTU가 그 역할을 학생들에게 확대해 2014년 9월에 만든 조직이 DTU 스카이랩이다.
사이언 DTU 단지 안에는 전자, 바이오·의료기기, 첨단로봇,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의 250여 개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었다. 이 업체들은 인원이 2∼10명인 작은 기업이 대부분이다. 곳곳에 있는 장비실에는 3D 프린터와 밀링머신(커터로 공작물을 자르거나 깎는 기구), 로봇팔, 각종 전자식 측정기구가 즐비하다. 입주 기업은 신청만 하면 무료로 이들 장비로 필요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사이언 DTU 측은 장비뿐만 아니라 회계와 비서, 연구 등의 인력까지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사이언 DTU는 사업 노하우를 알려주고 스타트업 간 또는 스타트업과 대기업 간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역할도 하고 있다. 사이언 DTU의 최고경영자(CEO) 스텐 도네르 씨는 “창업자들이 기술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시장에서 원하는 제품이 뭔지 모르는 등 마케팅 감각은 부족한 때가 많다”며 “각종 세미나와 행사로 스타트업끼리 정보를 공유하고 대기업 출신자와의 멘토링을 주선하며 부족한 점을 보완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이 성장하면 멘토들은 이들에게 투자하거나 이사가 되는 등 경영에 참여하기도 한다. ○ 회사 규모 관계없이 관심사 같으면 공동연구
덴마크의 또 다른 혁신의 축은 ‘덴마크 제조업 아카데미(MADE)’다. MADE는 한국의 대한상공회의소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해당하는 덴마크산업연합이 주도해 만든 기업-대학 간 파트너십이다.
처음에 22개 기업으로 시작한 MADE에는 현재 90개 기업이 속해 있고 30여 개 대학과 연구소도 가입돼 있다. 이들은 기업 규모에 따라 5000∼5만 크로네(약 85만∼850만 원)의 연회비를 내고 MADE가 주최하는 각종 학술대회 등에 참여하며 서로 교류하고 있다.
2013년 출범한 MADE는 대학이 하는 연구와 기업이 원하는 연구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에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을 ‘3D 프린팅’ ‘센서와 품질관리’ ‘초유연 자동화’ ‘공급 체인의 디지털화’ ‘평생 제품 특화’ 등 9개 분야로 나누고 각 분야에 관심 있는 기업을 모았다.
같은 분야에 속한 기업들은 공통의 연구 주제를 정해 대학과 연구소에 연구를 맡긴다. 연구비는 분담해 내고 연구로 생산된 지식재산권은 소유권과 사용권을 세분해 기업과 대학이 나눠 가진다.
같은 연구 주제로 묶이는 기업들은 규모와 업종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세계적 항공·방산 대기업인 ‘테르마’와 베이컨을 만드는 소규모 회사인 ‘데니시 크라운’은 ‘초유연 자동화’ 분야에서 로봇팔 연구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생산품은 다르지만 ‘무거운 것을 들어서 옮기는 기술’에 대한 관심사가 같기 때문이다.
MADE의 메레테 노르뷔 박사는 “주 연구분야는 공학적 첨단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적용과 리더십, 조직, 경쟁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도 가능하다”며 “연구 성과를 세계적으로 확산시켜 효과를 높이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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