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아버지의 교육 수준과 재력이 자녀를 거쳐 손자 세대까지 이어지는 ‘교육 기회의 3대 대물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부실 대학이 난립해 교육 사다리는 더 허약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교육 시스템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한국 사회의 ‘기회의 문’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
《 대기업 해외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유럽에서 살고 있는 이가연(가명·49) 씨는 몇 해 전부터 방학 때마다 아이들과 귀국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전문학원에 자녀들을 보내기 위해서다. 귀국할 때마다 학원비와 항공료 등으로 1000만 원 이상을 써야 했다. 두 자녀와 머물 집 월세(100만∼120만 원)는 별도여서 비용 부담이 컸지만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 씨는 “조기 해외유학을 떠난 강남지역 아이 중 상당수가 이렇게 한다”며 “남편 월급만으로는 부족해 시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귀띔했다. 》
자녀 교육의 성공 요인으로 ‘할아버지의 재력’이 등장한 건 이 씨 같은 사례가 적잖다는 의미다. 경제 성장으로 자본 축적이 가속화하면서 할아버지의 재력이 아버지와 손자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교육 기회의 대물림’이 고착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근거다. 실제로 한국교육개발원이 1943∼1986년생 7526명을 대상으로 2008∼2011년 설문조사한 결과 1956∼1965년생 베이비붐 세대에서 이 같은 대물림 현상이 확인됐다.
○ ‘3대 대물림’에 좁아진 교육 기회의 문
3일 교육개발원에 따르면 대졸 이상 아버지를 둔 1956∼1965년생이 4년제 대학 이상에 진학할 확률은 61.0%로 나타났다. 반면 아버지가 고졸인 경우 진학률은 39.9%, 중졸은 25.9%, 초졸은 16.1%로 떨어졌다. 아버지의 직업도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가 서비스계층(전문직, 경영·관리자) 종사자이면 4년제 대학 진학률이 64.1%로 높았다. 하지만 자영업자는 35.1%, 농민은 21.3%에 불과했다.
교육 격차는 소득 격차로 이어졌다. 4년제 대학 이상을 나온 응답자들은 월평균 323만 원(2009년)을 벌었다. 고졸은 203만 원, 중졸은 153만 원, 초졸은 112만 원을 벌었다. 손자 세대의 교육 격차에도 영향을 미쳤다. 석사 학위 이상 응답자 자녀의 전원이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고졸 응답자 자녀의 대학 진학 비율은 88.8%, 중졸은 71.5%, 초졸은 65.2%로 낮아졌다.
2000년대 초 확대 시행된 수시전형은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올인’하면서 생기는 사교육의 폐해를 막아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내신과 경시대회, 체험활동 등 ‘사교육 과목’을 늘려 계층 간 간극을 넓히기만 했다. 입시비리와 입학전형의 공정성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이화여대 부정입학 논란의 당사자인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는 2014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란 글을 올려 공분을 사기도 했다.
○ 대학의 하향평준화와 부러진 교육사다리
2008년 국내 대학 진학률은 80%를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 됐다. 하지만 대학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은 하지 못한 채 부실 학교 난립과 등록금 부담 증가 같은 부작용만 낳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일정 요건만 갖추면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 누구나 대학을 설립할 수 있게 하는 ‘대학 설립 준칙주의’를 도입했다. 이 결과 사립대가 1996년 109개에서 2013년 156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교육의 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또 대졸자의 눈높이에 맞는 괜찮은 일자리가 늘지 않으면서 취업 경쟁만 심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회의 문이 더 좁아진 것이다. 그 결과 대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졸업장 이외의 ‘스펙 쌓기’ 경쟁을 벌이는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정부의 학자금 대출은 부실 대학을 연명하게 하는 자금줄 역할을 하고 있다. 등록금이 가파르게 인상되면서 부모 세대의 삶과 노후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한 대기업의 인사 담당자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 때문에 악착같이 회사에 남으려는 직원이 많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교육 기회를 왜곡하지 않도록 교육 기회의 공정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성열 경남대 교수는 “한국형 ‘어퍼머티브 액션’(소수자 우대제도)을 통해 우수한 저소득층 자녀들이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삶을 꾸릴 수 있도록 교육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실 대학을 솎아내는 등 대학 교육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과 함께 직업교육 등을 확대해 일자리를 통해 중산층으로 나아갈 기회의 문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대학 교육 이외에 직업교육과 평생교육 등을 통해 계층이동이 활발한 사회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 기회의 문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학벌이나 연공서열보다 전문성을 토대로 취업하고 보상을 받는 노동시장 환경도 마련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수는 “전문성을 쌓고 직업을 택했을 때 합당한 임금과 복지 등의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 노동, 복지 개혁을 병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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