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최근 장관회의에서 “안전성이 확인된 계란 유통을 늘리고 계란 수입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에 따른 계란대란을 수습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보통 때라면 이걸로 끝이었다. 이날만은 다른 부처 A 장관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회의가 길어졌다. A 장관은 현장의 문제를 깊이 논의하지 않고 대책만 나열하는 농식품부 장관의 태도가 안이하다고 봤을 것이다.
위험에 눈감은 관료
장관들이 자리를 오래 지키는 1원칙은 ‘지금의 위기를 금방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라’, 2원칙은 ‘장기 과제를 추진하라’, 3원칙은 ‘나만이 1과 2의 원칙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하라’이다. 그래야 대통령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생각을 못 한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1일 4582자짜리 신년사에서 AI를 딱 2번 언급했고 긴급 방역과 예찰 강화 등 뻔한 대책만 반복했다. 농업인 소득 안정, 수출농업 장려, 일자리 창출, 농정 혁신 같은 중장기 과제들을 나열했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매진하면 힘든 일도 해낼 수 있다는 고사성어 ‘계이불사((계,결)而不舍)’도 인용했다. 관료의 생존 본능은 정국과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모양이다.
농식품부 관료들은 태생적으로 위기에 익숙하다. AI, 구제역, 소나무 재선충병 등을 연례행사처럼 겪으면서 생긴 면역력이다. 내부 매뉴얼만 잘 지키면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식이다. 2일 기준 AI로 도살처분된 가금류가 3000만 마리를 넘어서면서 농식품부 등은 AI 신고 건수가 줄고 있다는 대국민 홍보전에 나섰다.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AI 종식 선언을 준비하는 모양새다.
김 장관의 위기불감증을 보면 포식자를 눈앞에 두고도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위험이 사라졌다고 여기는 타조를 닮았다. 아무리 중요한 정보라도 자신에게 불리하면 고의로 무시하거나 방관하면서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게 관료들의 속성이다. 저널리스트 출신 기업가 마거릿 헤퍼넌이 지적한 ‘의도적 눈감기(Willful blindness)’가 바로 이렇다. 지난해 9월 인사검증 당시 김 장관은 개인적 의혹을 모두 부인했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상급자를 안심시키려고 사태를 축소하는 것은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치명적 결격 사유다.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김 장관과 닮았다. 주 장관은 그제 올해 연간 수출을 플러스(+)로 돌려놓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작년 수출을 크게 망쳤으니 올해 수출을 작년보다 조금만 덜 망치면 증가율은 플러스가 된다. ‘현상 유지도 버겁다’는 게 솔직한 현실이지만 그는 연수출 5000억 달러라는 숫자로 포장했다.
중국 정부가 한국산 배터리를 장착한 중국 전기차에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작년 말이다. 한국 측 협상 파트너인 주 장관은 왜 한국 기업이 뒤통수를 맞았는지 해명하고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타조처럼 모래에 머리를 넣어두었고 아무도, 심지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도 A 장관처럼 “그렇게 머리를 묻어둘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소득 없는 회의만 늘었다”
위기 국면에선 과거의 잘못과 약점을 드러내고 무엇부터 고쳐 나갈지 질문해야 한다. 요즘 공무원들은 전보다 회의를 많이 하지만 이런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 서로 불안하니까 모이긴 해도 소득이 없다. 모두가 의도적으로 눈감는 농식품부 장관, 산업부 장관 같다면 둑의 구멍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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