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애플리케이션(앱)을 켰다. 화면엔 눈앞에 보이는 실제 건물을 배경으로 귀여운 캐릭터가 나타났다. 캐릭터를 터치하자 ‘포인트 100점이 적립됐다’는 안내 문구가 나왔다.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모바일 게임 ‘포켓몬 고’를 떠올리게 하는 이 서비스는 하나금융그룹이 올해 초 선보인 증강현실(AR) 서비스 ‘하나머니 고’다.
‘하나머니 고’는 하나금융그룹의 통합 멤버십인 ‘하나멤버스’ 앱에서 이용할 수 있다. KEB하나은행, 하나카드, 하나금융투자 등 그룹 관계사나 제휴사 매장 근처에서 이 앱을 켜면 캐릭터나 쿠폰 아이콘이 화면에 나타난다. 이걸 터치해 포인트와 제휴 쿠폰을 받는다. 게임처럼 즐기면서 금융사의 부가 혜택까지 얻을 수 있다.
현대카드도 이달 10일 이와 비슷한 ‘금융판 포켓몬 고’ 서비스를 내놨다. 현대카드의 프로모션 앱 ‘조커(JOKER)’에선 휴대전화 화면에 나타난 조커 캐릭터를 잡으면 영화, 외식, 커피 등 제휴사의 다양한 쿠폰을 받을 수 있다.
금융사들이 금융 서비스와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런 게임형 서비스 개발에 앞다퉈 나서는 이유는 뭘까.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새로운 기술만으로 고객을 끌어들이는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더 편한 기술을 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이용하도록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는 이런 차별화된 비금융 서비스가 금융사의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창시자인 클라우스 슈바프는 저서 ‘제4차 산업혁명’에서 ‘디지털 기술’을 메가 트렌드의 하나로 꼽았다. 디지털 경제의 중심은 고객이다. 디지털화로 투명성이 높아지면 소비자가 기업 못지않게 많은 데이터를 얻을 수 있어 권력이 점점 더 소비자 쪽으로 이동한다. 소비자의 눈높이도 과거보다 더 빨리, 더 큰 폭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올해 금융사 수장들이 발표한 신년사에서도 이 같은 4차 산업혁명이 불러올 변화와 위기의식이 드러난다. 한동우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은 기존 산업을 근본적으로 바꿀 잠재적 파괴력을 보여 주고 있다. 차별화된 가치와 경험을 줄 수 있는 금융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도 “4차 산업혁명의 결과에 따라 전 세계 산업지도가 통째로 바뀔 수 있다. 디지털 금융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 밖에 금융업계에는 비금융사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인식도 커지고 있다.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미래학자들이 예측한 10년 뒤 글로벌 금융회사에 애플, 아마존, 구글, 알리바바, 텐센트가 등장한다. 이제 타 업종과 무한 경쟁을 펼쳐야 하는 시대”라고 강조했을 정도다.
이미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혁신적인 금융 서비스들이 등장하고 있다. 요즘은 미리 계좌를 등록해 두면 은행 대표번호로 ‘엄마. 10만 원’이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만으로 송금을 간단히 끝낼 수 있다. 모바일로 주식을 거래할 때 공인인증서를 쓰지 않고 홍채 정보로 본인 인증을 마칠 수 있다. 손바닥을 카드 단말기에 갖다 대 손바닥 정맥 정보로 결제를 마칠 수 있는 ‘바이오페이’도 상반기(1∼6월)에 선보인다.
금융사들의 생존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즐거워지는 건 소비자들이다. 은행이나 카드사의 도움 없이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금융은 필요하지만 은행은 사라질 것(Banking is necessary. Banks are not)”이라던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 빌 게이츠의 예언이 현실이 될 날도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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