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호 선사’ 한진해운은 2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롱비치터미널(TTI)의 지분 54%를 스위스 해운기업 MSC(지중해해운)에 7800만 달러(약 897억 원)를 받고 넘겼다. TTI는 미 서부항만 컨테이너 물동량의 30% 이상을 처리하는 ‘알짜’ 자산이다. 지난해 9월 법정관리에 들어간 한진해운은 17일 파산 선고를 받는다.
TTI를 인수한 MSC는 컨테이너선 480척으로 150개국, 315개 항구를 오가며 직간접으로 6만 명을 고용하는 세계 2위의 컨테이너 해운회사다. 본사는 이례적으로 바다가 없는 내륙국 스위스에 있다. 스위스는 해운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레만 호, 보덴 호 등 호수를 오가는 배 49척(약 170만 t)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전 세계 해운업에서 스위스의 비중은 0.1% 미만이다. 상선 역사도 100년 미만으로 짧다. 그러나 설탕 면화 등 전 세계 건조 화물의 22%는 MSC 등 스위스 해운회사가 취급한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가능할까.
MSC는 1970년 이탈리아 출신의 잔루이지 아폰테(77)가 빌린 돈 5000달러로 독일의 중고 선박을 구입해 출범했다. 그의 가족은 나폴리에서 300년 이상 뱃일을 해 온 뱃사람들이다. 아폰테는 지중해 항구와 소말리아 등 아프리카를 오가는 항로에 주력하며 큰돈을 벌었다. MSC는 회사가 커지자 본사를 스위스 제네바로 옮겼다. 이탈리아 국적의 아폰테는 사실 스위스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렇다면 아폰테는 왜 제네바에 둥지를 튼 것일까.
인구 20만 명의 제네바는 전 세계 원자재의 40%가 거래되는 국제 무역 도시다. 전 세계 곡물의 65%, 금속 60%, 설탕 커피 50%, 석유 코코아 35%가 스위스에서 거래된다. 직접적인 거래 액수만 연간 200억 스위스프랑(약 23조 원)을 웃돈다. 1조5000억 스위스프랑(약 1717조 원)에 달하는 원자재 관련 자금이 스위스에서 관리된다.
제네바에는 운송, 화물 점검 등 부가적인 일감이 넘쳤다. MSC는 본부를 제네바로 옮겼다. 부가적인 일감도 제네바에서 거래되기 때문이다. 1878년 프랑스 루앙에서 설립된 세계 1위의 선적 전 검사(수출 전 상품검사) 회사인 SGS도 제네바에 본사를 두고 있다. SGS는 전 세계에 2000개의 사무소를 운영하며 9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제네바에는 리버레이크 등 크고 작은 선박중개회사들이 설립됐다. 튼실한 스위스의 금융 인프라 덕분에 선박금융도 쉽게 성장했다.
한진해운은 호황기 비싼 값에 배를 빌렸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일감이 줄어들자 금융비용을 감당하지 못한 채 파산에 내몰렸다. 해운업에서 금융업, 원자재 거래시장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해운업을 튼실하게 만들려면 이런 연관 산업부터 키워야 한다. 국내 시중 은행들은 해운업의 이런 특성을 잘 몰라 경기가 좋지 않으면 지레 겁을 먹고 자금을 회수하기 바쁘다. 동북아 오일허브 등의 글로벌 원자재 거래 시장 구상도 지지부진하다. 바다가 없어도 해운업은 성장할 수 있다. ‘3면이 바다’라도 해운업이 저절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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