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칼퇴’가 로망이 아니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유영 경제부 차장
김유영 경제부 차장
정부가 23일 내수 활성화 방안을 발표한 뒤 냉소 섞인 반응이 쏟아졌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오후 4시 조기 퇴근을 유도해 소비를 늘리겠다는 대목에서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0분씩 더 근무하고 금요일에 2시간 일찍 퇴근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다. 당장 현장에서는 ‘칼퇴(정시 퇴근)도 힘든데 조기 퇴근이라니’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왔다.

직장인이라면 누군들 칼퇴 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시간 빈곤’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적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인의 근로 시간은 거의 선두(2위)를 달리면서도 생산성은 하위권(22위)에 그친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드물게 칼퇴가 잘 지켜지는 IBK기업은행도 칼퇴를 정착시키기까지 10년이 걸렸다. 이곳은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인력이 줄어들어 매월 마감 때면 야근이 잦아지자 2000년대 초반부터 정시 퇴근 캠페인을 벌였다. 본점에선 퇴근 시간이 되면 노조가 확성기를 들고 ‘퇴근하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결국 2009년에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오후 7시가 되면 업무용 PC를 강제적으로 꺼버리는 것이었다. 야근하려면 부서장(또는 지점장)의 사전 결재를 받게 했다. 지점의 평균 퇴근 시간은 부서장의 성과 평가에 반영했다. 퇴근 시간은 데드라인(deadline)이 됐다. 그야말로 넘기면 죽는다는 시간이 생기니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부서장부터 나서서 칼퇴를 독려했다. 아침마다 한 시간 넘게 늘어지던 회의는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끝냈다. 야전사령부처럼 헤쳐 모이는 식의 ‘스탠딩 회의’도 생겨났다. 상부에 보여주기 위한 보고나 불필요한 보고서 작성이 사라졌다. 어차피 다들 늦게 퇴근하니 낮에 빈둥거리다가 밤에 일하거나 상사 눈치를 보며 자리를 지키는 야근이 없어졌다.

PC를 꺼버리기 전 오후 9시를 넘겼던 평균 퇴근 시간은 지난해 오후 6시 42분으로 당겨졌다. 이렇듯 퇴근 시간을 당기는 건 정부가 급조한 대책으로 기업을 계도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당위를 주장하는 건 쉽지만 실행은 또 다른 문제다. 직원들을 제때 퇴근시키겠다는 강한 의지와 평가 등 이를 현실로 만들 체계적인 제도가 없다면 이뤄지기 어렵다. 구성원 간에 ‘결과 지향적인(result-oriented) 문화’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더욱이 이번 대책이 내수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면 정부의 문제 진단이 잘못됐다. 어렵사리 직원들을 일찍 퇴근시킨다 한들 그 대상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직원처럼 일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고용이 안정됐고 급여 수준도 높은 편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정작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쓸 돈이 없는 게 현실이다. 1월 실업자가 100만9000명이나 되고, 일자리를 구해도 비정규직이라면 이들의 임금은 정규직의 절반(53.5%·2016년)에 그친다. 또 설령 직업이 있어도 가계 빚더미에 시달려 돈 쓸 여유가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난해 가계부채는 1344조 원에 이른다.

이번 대책을 두고 ‘공무원들이 회사 생활을 알기나 하는 것이냐’부터 ‘쓸 돈도 없는데 놀면서 돈 쓰라는 말이냐’는 비난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진짜 문제를 간파하지 못한 칼퇴 정책은 ‘로망’으로 남고, 정부의 내수 활성화 대책은 또다시 헛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김유영 경제부 차장 abc@donga.com
#정부#내수#활성화#조기 퇴근#칼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