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개봉한 영화 ‘엑스 마키나(Ex Machina)’에는 매혹적인 여성 인공지능(AI) ‘에이바’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영화 제목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연극 용어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 따온 말이다. ‘기계를 타고 내려온 신’을 뜻한다. 만약 영화 속 주인공 에이바처럼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AI가 나의 쇼핑 도우미가 된다면 어떨까.
“에이바, 오늘 저녁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 좀 구입해 줘.”
말 한마디에 에이바는 내 체형과 취향, 파티의 성격에 딱 맞는 멋진 드레스와 액세서리까지 추천해줄 것이다. 나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취향까지 알아맞히는 에이바에게 감탄하는 사이, 밖에서는 이미 초인종이 울린다. 저녁 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가 벌써 도착한 것이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상상 속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 온라인 유통공룡 아마존은 이미 고객 데이터를 분석해 고객 개개인의 성향에 맞는 상품을 추천하고 주문까지 해주는 AI 비서 ‘알렉사(Alexa)’를 상용화했다. 또 AI를 통해 소비자가 언제 어떤 물품을 필요로 할지를 예측해 주문하기도 전에 소비자 근처에 상품을 이동시켜 두는 ‘구매 예측 시스템’을 특허 출원한 상태다. 유통은 바야흐로 철저한 개인화 서비스를 바탕으로 한 ‘ZEC(Zero Effort Commerce·최소한의 노력으로 구매하는 쇼핑 방식) 시대’로 진화해 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모든 사물과 사람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이제 사물인터넷(IoT), 고객의 구매명세와 결제정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생성된 방대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이를 분석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AI의 몫이다. 데이터가 풍부할수록 매출과 재고 예측, 소비자 취향 파악을 더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다.
최근 아마존이나 알리바바가 오프라인 매장 진출을 서두르는 이유 중 하나는 더 풍부한 데이터 확보에 있다. 지난해 말 아마존은 무인 계산대 식료품점인 ‘아마존 고(Amazon Go)’를 선보였다. 아마존은 이를 통해 고객이 어떤 상품에 관심을 보였는지, 어떤 경로로 이동하면서 쇼핑을 했는지, 무엇을 구매했는지 등 다양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얻은 데이터를 온라인 데이터와 통합해 더 똑똑한 상품 추천을 하면서 고객 충성도를 높여 나갈 것이다.
결국은 ‘데이터’ 싸움인 것이다. 이제는 ‘막연한 감’에 의해 상품을 팔던 시절이 지나고 있다. 객관적인 데이터 분석과 거기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기획하는 시대다. 다양한 소스의 데이터를 고객 분석 전략과 잘 통합해야만 비로소 소비자의 지갑을 열 수 있다.
문제는 국내 유통업체들의 대응 속도가 글로벌 업체들에 비해 느리다는 점이다. 구매명세 등 기존 정형 데이터뿐만 아니라 구매 전 행동 등 새로운 유형의 비정형 데이터가 전례 없는 속도로 쏟아지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다. 유통의 국경이 무너지고 있는 때에 어느 날 갑자기 빅데이터와 AI로 무장한 글로벌 유통공룡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말란 법이 없다. 뒤늦게 후회하는 ‘만시지탄의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기업과 정부가 합심해서 대응에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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