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이 참 지저분하게 났죠. 보험사들은 보험금을 다 주고도 비판을 받고, 금융감독원도 승복을 받아냈지만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됐으니까요.”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버티던 삼성생명과 한화생명이 이달 초 보험금 전액을 주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보험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금감원은 16일 제재심의위원회를 다시 열어 당초 두 회사에 예고했던 징계의 수위를 낮췄다. 보험금을 다 주기로 한 점을 감안했다는 것이다. 3년 넘게 끌어온 자살보험금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이번 사태를 통해 한국 금융의 후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발단은 국내 보험업계의 무분별한 베끼기 관행이었다. 2001년 한 보험사가 실수로 자살에 재해사망보험금을 주는 약관을 만들었는데, 다른 생보사들이 이를 베껴 상품을 내놓은 것이다. 이후 보험사들은 ‘약관에 오류가 있었다’며 자살에 재해보험금이 아닌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했다.
ING생명 검사를 계기로 2014년 금감원이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나섰지만 삼성·한화·교보생명 등 ‘생보사 빅3’를 포함한 생보사들은 소송 결과를 지켜보겠다며 버텼다. 약관을 이행하지 않는 보험사들의 행태에 가뜩이나 낮은 보험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초기에 문제를 잡아내지 못한 금감원은 원칙에서 어긋난 대처로 사태를 키웠다. 대법원이 지난해 9월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내놓자 금감원은 중징계 카드로 보험사들을 압박하며 승복을 받아냈다. 감독당국은 소비자 권익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법치주의라는 원칙 대신 힘으로 문제를 해결한 나쁜 선례를 남겼다.
보험사들은 보험 가입을 권유할 때 온갖 약속을 다 하면서 막상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리면 이런저런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꺼리는 일이 많다. 약관조차 믿을 수 없게 되면 소비자들의 불신은 더 커진다. 이런 사태가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보험업계와 감독당국 모두 수준을 한 계단 끌어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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