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돈 걱정에 “영혼이 탈탈”… 게임-덕질로 고단한 삶 위안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31일 03시 00분


[창간 97주년/2020 행복원정대/청년에게 희망을]<1> 2017 청년에게 행복이란
대학생 SNS 게시물 분석
“빈말이라도 일하라는 말 듣고싶어” 명문대 출신 알바생 글에 폭풍공감
‘돈’ 관련 불행 게시물, 행복의 29배… 스펙 집착… 동아리도 취업 대비
행복 게시물엔 엑소-포켓몬 등장… 사적 영역서 소소한 즐거움 찾아

《 지난해 가을 서울의 한 사립대학을 졸업한 이모 씨(25·여)는 4년의 서울 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충북 충주시의 본가로 내려갔다. 이 씨는 지난해 하반기 기업 공채에 도전해 2주간 자기소개서를 35번 써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전공과 취미를 살려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도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이 씨는 “수차례 ‘최종탈(최종 면접 탈락)’을 하다 보니 영혼까지 ‘탈탈’ 털린 느낌이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고향에서 쉬면서 ‘멘털 회복’부터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 2020행복원정대 취재팀과 숭실대 배영 교수팀이 지난해 대학생들이 이용하는 페이스북 대나무숲 페이지를 분석한 결과 불행 관련 게시물이 가장 많았던 분야는 역시 정치사회 분야였다. 최순실 게이트와 탄핵 정국이 계속되면서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해선 불행 게시물이 행복 관련 글의 84배나 많이 올라왔다.

이 항목을 빼면 ‘취업’과 ‘돈’에 대한 고민이 학생들을 ‘불행의 늪’에 빠뜨리는 핵심 요인으로 분석됐다. 취업의 경우 행복 게시물 하나당 불행 게시물이 11.2개꼴, 돈은 29.0개꼴로 올라왔다. 배영 교수팀의 선행 조사에서도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 요인 1위는 취업·고용 불안(34.7%)이었다.

○ 반복된 ‘최종탈’에 탈탈 털린 행복


“가능성이 희박한 취업으로 고민하고 있고, 돈이 없어서 알바로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빈말이라도 좋으니까 아무나 ‘일할 자리 있으니까 당분간 여기서 일해라’라고 좀 말해주시면 안될까요?”

지난해 11월 ‘고려대 대나무숲’ 페이지에 올라온 글이 학생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 학생은 “취업, 돈…. 그게 뭐라고 이렇게 힘들어야 하느냐”고 적었다. 극심한 취업난 속에서 대학 졸업장은 빛을 잃었다. 명문대 졸업생조차 취업 고민을 피해 가지 못한다.

일자리는 행복과 직결된다.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지난달 내놓은 세계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실업자가 취업자보다 더 불행감을 느낀다. 또 어렵게 취업을 해도 실직의 고통이 ‘트라우마’로 남아 행복감을 갉아먹는 것으로 분석됐다.

배영 교수팀은 지난해 3월 21일부터 1년간 트위터에서 일자리 관련 16개 단어와 함께 언급된 단어의 등장 빈도를 분석했다. 분석 결과 스펙(3만9760회) 여성(3만6231회) 취업(3만5284회) 고학력(3만2611회) 고소득(3만2415회) 등의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 청년의 관심이 취업을 위한 스펙과 조건, 그 결과로 얻는 ‘돈’에 쏠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 것은 취업 시장에서 여성이 상대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 ‘기-승-전-취준’ 스트레스 시달리는 청년들

한국 청년들은 ‘고3 입시 스트레스-대학 4학년 취준(취업 준비) 스트레스’로 이어지는 스트레스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취재팀이 네이버 취업 카페 ‘스펙업’의 대학생활 게시판에 최근 1년간 올라온 취업 관련 게시물 828개를 발췌해 분석한 결과 취미 활동과 교류의 공간인 ‘동아리’조차 취업과 관련한 주요 연관 단어로 등장했다.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권모 씨(28)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다. 권 씨는 “교육학을 공부해 유학도 가고 싶었지만 학비를 대준 부모님께 더 부담을 드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스펙업 게시물 분석에서도 ‘대학원’의 경우 ‘부모님’이라는 단어와 높은 연결성을 보였다. 비싼 학비로 인해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청년 실업의 고통이 주변 사람에게 전염되는 ‘스필오버’ 효과가 나타나 사회 전체의 불행지수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취업 준비와 아르바이트로 지친 학생들은 작은 여유에도 행복한 감정을 분출했다. 대나무숲에서 ‘시간 여유’를 언급한 게시물 317개 중 230개(72.6%)가 행복 관련 게시물로 분류됐다. 행복 관련 게시물 비중이 10대 행복 조건 중 가장 높았다. ‘엑소(EXO·아이돌 그룹)’ ‘포켓몬고’(게임) ‘오버워치’(게임)를 통해 청년들은 한 템포 쉬어가며 몰입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나무숲 페이지에는 길고양이, 여름철 매미처럼 바쁜 일상의 여유에 행복감을 표현하는 글도 많았다. 대학생 조형기 씨(26)는 “‘덕질(마니아 활동)’은 메마른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힘든 삶을 지탱해주는 빛과 같다”고 말했다.

취업난과 혼란스러운 사회 현실에 지친 청년들이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매달리는 건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난해 유행한 ‘휘게(hygge·안락하고 쾌적한 삶을 뜻하는 덴마크어)’에 청년 세대가 열광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적 영역에서 절망과 체념을 겪은 청년들이 사적 영역으로 들어가 나름대로 행복의 ‘진지(陣地)’를 구축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 어떻게 조사했나 ::

동아일보 2020행복원정대 취재팀은 배영 숭실대 교수팀과 함께 페이스북, 트위터, 포털사이트 카페에 올라온 10대 행복 조건 관련 게시물의 의미를 분석한 ‘청년 행복지도’를 작성했다. 주관적인 행복감에 치우칠 수 있는 설문조사 대신 청년들이 고민과 감정 등을 털어놓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이를 위해 페이스북에서 각 대학 또는 학생회가 운영하는 익명 페이지 중 ‘페이지 좋아요’가 1만 명 이상인 45곳을 대상으로 2016년 3월∼2017년 2월 올라온 게시물 2만2117건을 수집했다. 네이버 취업 카페 스펙업의 ‘대학생활 게시판’에 같은 기간 올라온 취업 관련 게시물 828건도 수집했다. 트위터에 올라온 취업 관련 게시물도 모았다. 이 내용을 빅데이터 분석 방식인 ‘텍스트 마이닝 기법’으로 분석했다. 통계 프로그램 R 등을 이용해 단어 사이의 거리를 수치화해 연관성도 살폈다.
 
권기범 kaki@donga.com·김아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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