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주오(中央) 구의 요양시설 실버윙 신토미. 3층에 모인 노인 10여 명이 인공지능(AI) 로봇 페퍼와 함께 팔을 흔들며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페퍼는 고개를 돌리며 한 명씩 눈을 맞췄고 노래가 끝나자 “재미있으셨나요”라고 깍듯하게 인사했다. 노인들은 마치 인간을 대하듯 페퍼에게 “수고했습니다”라고 인사했다.
페퍼는 일본의 정보통신회사 소프트뱅크가 2014년 선보인 세계 최초의 감정 인식 로봇으로 지금까지 1만 대 이상 팔렸다. 식당 카페 등에 이어 이젠 요양시설에도 투입돼 외로운 노인들을 즐겁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세키구치 유카리(關口ゆかり) 시설장은 “(요양시설) 직원이 말을 걸면 ‘시끄럽다’고 하던 노인들도 로봇이 하자고 하면 적극적으로 따라 한다”며 “키가 작고(페퍼는 121cm) 귀여운 외모 때문에 손자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 노인들과 놀아 주는 AI 인기 폭발
한국보다 먼저 고령화와 젊은 노동력 감소가 심화되는 일본에선 로봇을 요양시설에 적극 도입하고 있다. 8층 건물인 실버윙 신토미에는 20여 종, 100여 대의 로봇이 배치돼 있다. 장단기 입소자 46명과 데이서비스(낮 시간에만 돌봐 주는 서비스) 이용자 34명이 있으니 고령자 1인당 로봇 1대 이상이 대응하는 셈이다.
노인들과 대화하고 레크리에이션을 주도하는 ‘페퍼’는 치매 환자의 인지 능력을 높이고 정신적 안정을 도와주는 커뮤니케이션 로봇의 대표 격이다. 후지소프트가 개발한 ‘파르로’도 마찬가지다.
“처음 뵙는 거죠? 말하기 좋아하는 로봇입니다.”
지난달 29일 가나가와(神奈川) 현 요코하마(橫濱)의 후지소프트 본사를 방문했을 때 로봇 파르로가 경쾌하게 말을 걸어 왔다. 이어 “그럼 시작해 볼까요”라고 운을 떼더니 직접 사회를 보면서 노래와 춤을 유도했다. 우에타케 준지(上竹淳二) 파르로사업부 마케팅 실장은 “얼굴을 인식해 당신을 처음 만났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키 40cm가량인 이 로봇은 30분 정도는 혼자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다.
우에타케 실장은 “자체 실험 결과 파르로를 도입한 시설에서 고령 환자의 적극성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로봇과 대화를 하고, 노래와 춤을 즐기고, 퀴즈를 풀면서 환자들이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 로봇은 특히 같은 말을 반복하는 치매 환자들에게 좋은 말 상대가 된다. 일본에는 현재 인간, 강아지, 고양이, 바다표범 등을 닮은 커뮤니케이션 로봇 수십 종이 판매되고 있다.
○ 정부도 적극 지원 나서
로봇이 고령 환자들의 인지 능력 훼손을 막고 건강 유지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정부도 적극 지원에 나서고 있다. 아직 초기이다 보니 로봇의 대당 가격은 수백만∼수천만 원에 이른다. 실버윙 신토미는 정부 지원을 받아 다수의 로봇을 구입할 수 있었다. 세키구치 시설장은 “정부로부터 평균적으로 로봇 가격의 70%가량을 보조금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2010년 개발된 파르로는 현재 일본 전체에 800여 대가 보급됐다. 대당 가격은 세금을 포함해 72만3600엔(약 740만 원). 결코 싸지 않지만 정부가 지난해 520억 엔(약 5300억 원)을 요양시설 로봇 보급에 지원한 덕분에 판매가 크게 늘었다. 지난해 6월 범정부적으로 만든 ‘1억총활약플랜’에도 요양시설 로봇 보급이 주요 과제에 포함됐다.
일본 정부는 올해 로봇 구입에 필요한 대출 한도를 종전 300만 엔(약 3100만 원)에서 10배인 3000만 엔(약 3억1000만 원)으로 늘리는 등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앞으로 요양시설에 AI를 도입해 로봇들이 수집한 정보들을 종합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노인들의 병세 악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 시설 직원 일 줄어
로봇들은 직원들의 일을 줄이는 데도 한몫하고 있다. 모니터링 로봇의 활용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침대 근처에 설치돼 입소자의 상태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이상 징후가 나타나면 즉시 직원의 단말기로 알려 준다. 시설 관계자는 “밤에 수시로 입소자들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돼 직원들의 부담이 한결 줄었다”고 말했다. 수면 상태를 자동 체크해 노인 건강관리에도 도움을 준다. 시설 측은 아울사이트, 네무리스캔, 에이아이센스 등 3종류의 모니터링 로봇 48대를 도입했다.
직원들의 육체적 부담을 덜어 주는 로봇도 있다. 다른 요양시설과 마찬가지로 이 시설 직원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노인들을 들었다 내렸다 해야 해 70%가량이 요통을 앓고 있다. 직원의 어깨와 허리에 부착하는 ‘머슬슈트’는 최대 30kg의 무게를 덜어 줘 허리의 부담을 3분의 1로 줄였다. 기자가 직접 착용해 보니 부착하는 과정이 약간 번거로웠지만 호흡만으로 로봇을 제어하며 무거운 짐을 쉽게 들 수 있었다.
파나소닉에서 개발한 ‘리쇼네’는 버튼만 누르면 침대의 절반이 휠체어로 변한다. 환자를 들지 않고 바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뒤에서 잡아 주기만 하면 계단을 척척 알아서 내려가는 ‘스칼라모빌’이라는 휠체어 로봇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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