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7일까지 ‘청년 앵그리보드’를 들고 경북대 경일대 백석대 서울대 숙명여대 숭실대 유원대 전북대 전주대 호서대 그리고 서울의 대표적 고시촌인 노량진을 직접 찾아가 청년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른 37개 대학과 고시촌에 있는 청년들을 만나거나 따로 그들의 목소리를 취재수첩에 적었다. 그들은 대부분 각자의 목표와 희망을 앞세워 말했지만 그 뒤에는 더 짙은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 “눈높이 낮추라고요? 해보지도 않고요?”
많은 중장년 기성세대가 손가락질하며 청년들을 비판하는 이유 중 하나는 취업의 ‘눈높이’다. 높은 곳만 올려다보니 일자리가 남는데도 취업을 못 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얘기를 듣는 청년들의 심정은 어떨까.
4일 경북 경산시 경일대 중앙도서관에서 ‘누군가가 취업의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한다면’이란 물음을 던졌다. 보드를 채운 대답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될 때까지 한다” “그거는 내가 알아서 할 문제지” “저를 높이겠습니다” 등이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느냐”란 대답에는 취재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학교는 지난해 대구·경북 지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취업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취업 유지율이 높지 않다는 점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학교가 학생과 지역 중소기업을 직접 연결해주며 입사에 성공하는 학생이 많지만 직장 만족도가 낮으면 결국 회사를 나온다는 것이다. “눈높이를 낮춰라”란 조언이 일자리 해법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소기업을 가려고 해도 직장 정보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어렵다는 하소연도 많았다. 숙명여대 졸업생 박소현 씨(25)는 중국에서 해외영업 업무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중소기업에라도 취업하겠다는 생각이다. 박 씨는 “상장된 기업은 전자공시 정보라도 찾아보지만 비상장사는 그마저도 힘들다”고 얘기했다.
○ 앵그리보드 가득 채운 분노·항의·냉소
익명의 앵그리보드를 앞세웠을 때 청년들은 좀 더 쉽게 각자의 감정을 표현했다. 바쁘다며 그냥 지나가다가도 손에 펜을 쥐여주면 대부분 순식간에 답을 써냈다. 그 답변들은 청년들이 현 상황을 바라보는 인식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앵그리보드에 ‘노력을 더 하라는 기성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받은 곳은 서울대 전북대 전주대 노량진 4곳이었다. 이곳에서 받은 141개의 답 가운데 61개(43.3%)는 “니가 해봐 되나” “잔소리 한 번에 5만 원입니다” 같은 반발·비난형 응답이었다. “출발선을 같게 해주세요!” “힘드네요”처럼 하소연하는 형태의 응답은 24.1%(34개), “모두 파이팅해요!”처럼 자기 위로의 응답이 19.9%(28개)로 그 뒤를 이었다.
‘청년 일자리를 가로막는 장벽은…’이라는 질문을 던진 전주대와 전북대에서는 절반 이상의 청년들이 △대기업 위주 성장 체제 △경제 저성장 △중소기업의 현실 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30% 이상의 학생들은 △경험 차이 △스펙 △학점 △외모 같은 각 개인의 부족함을 썼다.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이 취업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다. 낙하산, 금수저 같은 답변도 있었다.
○ “두 명이 할 일을 한 명이 하는 거 아녜요?”
예상보다 많은 청년이 ‘공’자가 들어간 직장을 원했다. 공무원, 공기업, 공단…. 정년이 보장되고 근로 여건이 좋다고 알려진 일터들이다. 일자리가 부족하다는데도 경쟁이 치열한 ‘좋은 직장’으로 몰리는 청년들. 확실히 이율배반적이다.
하지만 얘기를 들어볼수록 청년 각자에게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점 역시 분명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기업에 취업해도 다른 곳보다 월 100만∼200만 원 더 받으며 혹사당하거나 혹은 못 버티고 나오는 경우를 실제로 보면서 정한 목표라는 것이다. 많은 공기업이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갔지만 공기업이라면 오지에 있어도 상관없다는 청년이 많았다.
근로 여건에 대한 자각은 청년들이 생각하는 일자리 나누기(잡 셰어링)의 방향으로 자연스레 연결됐다. 청년들의 얘기는 간단했다. 야근이 일상화된 일반 기업이 공기업처럼 근로 여건을 개선하기만 해도 일할 곳이 늘어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청년들의 사연은 각자 다양하고 또 복잡했다. 아직 절망보다는 희망을 얘기하고 ‘좋은 직장’을 목표로 세우기도 했지만 스스로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으로 목표를 낮춘 청년도 있었다. 5일 충북 영동군 유원대 영동캠퍼스에서 만난 호텔관광항공영어과 3학년 김지아 씨(21·여)는 대기업 항공사 지상직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의료보건행정학과 4학년 김선주 씨(22·여)는 “월급 120만 원짜리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우선 일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취재팀이 따로 만난 이들 가운데는 전쟁에 가까운 취업 경쟁에서 상처 받고 학교 뒤편으로 숨은 이들이 있었다. 취업을 사실상 포기하거나 주변에 말로는 취업 준비를 한다고 하면서 학교 주변을 떠도는 청년과 정규직 취업에 실패한 뒤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하는 청년들. 누구보다 다양한 스펙을 쌓아놓고도 취업불안증에 시달리는 이들과 오랜 취업 준비로 몸과 마음이 병든 이들이다. 그들의 가슴속 이야기와 앵그리보드에 담긴 학생들의 솔직한 대답들은 앞으로 계속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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