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은 영혼을 잠식한다… 고시원 옆방 작은 소음에도 버럭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4일 03시 00분


[청년에게 일자리를/청년이라 죄송합니다]1부 ‘노오력’의 배신
“교사 임용시험 도전 7년째 좌절만… 자괴감, 부모님께 죄책감에 우울증
컵밥으로 끼니 때워 몸버리고 탈모… 업무 스트레스 받아보는 게 소원”
20대 우울증-불안장애-강박증 급증

그래픽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그래픽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 지난해 12월 김대호(가명·32) 씨는 7년간의 노량진 생활을 접기로 결심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임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2010년 이곳에 발을 들였다. 일곱 번의 불합격은 마음에 깊은 상처만 남겼다. “일반 회사 취업도 알아봤는데 임용시험만 준비했던 나 같은 사람을 뽑아 주는 데가 없더라고요.” 자괴감, 외로움, 경제적 어려움에 짓눌리던 그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결국 모든 취업 준비를 중단하고 노량진을 떠났다. 지금은 상담치료를 받으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무한 취업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 탈락으로 인한 좌절이 반복돼 정신적 고통이 크지만 이를 돌볼 여유조차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대 우울증 환자는 2010년 4만5900명에서 2015년 5만2121명으로 5년 만에 13.6% 늘었다. 같은 기간 20대 불안장애 환자(3만3890명)는 30.5%, 강박장애 환자(6110명)는 18.7% 늘었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취업 스트레스로 우울증에 걸린 청년들은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진다고 호소한다. 우울증에 걸리면 집중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져 취업이 더 힘들어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 불합격 통보를 받을 때마다 김 씨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부모였다. 아버지는 “돈 걱정 말고 빨리 합격하는 게 효도”라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돈을 아끼려고 컵밥이나 간단한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다. “달콤한 케이크라도 하나 사먹으면 스트레스는 풀리지만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는 죄책감이 들어요.”

지난해 1월 충남 천안에서 30대 남성이 자살했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던 이 남성은 시험에 합격했다고 가족을 속인 채 1년간 가짜로 출근했다. 월급을 받은 것처럼 꾸미려고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취업 준비를 지원해준 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컸던 탓이다. 위진아 서울 동작구마음건강센터 정신보건임상심리사는 “취업 스트레스가 우울증, 강박장애, 섭식장애로 이어지는데 이를 방치하면 극단적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합격자는 떠났고 새로운 경쟁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얼마나 공부를 해야 합격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함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결국 나 혼자’라는 외로움도 커져만 갔다. 독서실이나 고시원 사람들은 대화를 하는 대신 포스트잇을 붙였다. “예전 같으면 따지고 싸울 일인데 이젠 그럴 시간조차 아까워 일방적으로 분노를 표출만 하는 거죠.”

‘공시생(공무원시험 수험생) 같은데 매일 커피 사들고 오시는 건 사치 아닐까요? 같은 수험생끼리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져서요. 자제 좀 부탁드려요.’ 올 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던 메모지 내용이다. 일부 독서실은 ‘가방 지퍼를 밖에서 열고 들어오라’ ‘스프링 튕기는 소리가 거슬리니 3색 볼펜을 쓰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붙여 둔다. 도서관이나 독서실에서 작은 소리만 나도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쳐다보며 민감하게 구는 사람을 조롱하는 ‘도서관미어캣’이란 용어도 있다.

# 언젠가 거울 앞에 섰다가 절반으로 줄어든 머리숱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시험이 다가오면 과민성대장증후군에 시달렸지만 합격이 먼저라는 생각에 꾹 참았다. 어느 날 밤 고시원 방에 누웠는데 열이 심하게 났다. 급한 대로 열을 식히려고 물티슈를 정신없이 뽑아 이마에 붙였는데 서러움이 왈칵 밀려왔다. ‘부귀영화를 바란 것도 아니고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취재팀은 서울 동작구보건소에 취준생들이 많이 먹는 편의점 도시락, 컵밥, 고카페인 음료의 영양 분석을 의뢰했다. 이들 음식은 공통적으로 나트륨이 많고 채소가 부족해 영양불균형이 우려됐다. 홍윤정 동작구보건소 영양사는 “나트륨을 과다 섭취하면 고혈압을 유발할 뿐 아니라 심장 질환 뇌혈관 질환 등의 위험이 증가한다”고 말했다. ‘잠이 오지 않는 우유’로 취준생에게 인기인 일명 ‘스○○ 커피우유’ 한 팩(500mL)에는 하루 기준치의 60%인 카페인 237mg이 들어 있다.

# ‘호모 고시오패스’라는 용어에 대해 김 씨는 “복잡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일 때문에 스트레스 한번 받아 보는 게 소원이라는 청년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공감할 수밖에 없어서다. 취업 스트레스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오죽하면 저렇게 됐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면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는 차가운 말은 차마 못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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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애진 jaj@donga.com·위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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