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휴가를 계획 중인 중견 기업 직장인 김모 씨(33)는 휴가 신청서를 앞에 두고 ‘작문’을 구상 중이다. 입사 초기 휴가 사유를 ‘친구들과 놀러간다’고 썼다가 부장의 호된 질책을 들었던 기억 때문이다. 김 씨는 “휴가 신청서를 올리면 ‘한창 바쁠 땐데, 급한 일이냐’는 반격부터 온다”며 “정말, 어쩔 수 없이 휴가 가야 한다는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고 말했다.
유통기업에 다니는 박모 씨(36)는 휴가 신청서의 행선지에 반드시 ‘해외’라고 적는다. ‘다음에 가면 안 되냐’는 상사의 질문에 “이미 항공편과 숙박을 예약해 취소하면 위약금이 엄청나다”고 호소하기 위해서다. 휴가 기간 카톡과 전화 공세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박 씨는 “휴가는 당연한 권리인데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를 굳이 보고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법적으로 보장된 연차휴가지만 전부 ‘찾아 먹는’ 직원을 ‘간 큰 직원’으로 생각하는 기업이 아직 많다. 휴가를 내려면 결재라는 큰 산부터 넘어야 한다. 휴가를 권리로 인정한다면 휴가 사유부터 묻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6월 경제5단체가 직장인 5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장인 10명 중 3명(31.7%)은 휴가 사유를 실제와 다르게 적어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54.2%는 “휴가 사유를 기재하지 않는 것이 휴가 이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휴가 사유를 밝히고 결재를 받으니 휴가는 회사의 특별한 ‘배려’가 된다. 직장인 이모 씨(39)는 휴가 가기 전후로 팀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바쁜 와중에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휴가를 시작한다. 돌아오면 ‘배려해 주신 덕분에 잘 쉬고 왔습니다. 앞으론 더욱 업무에 매진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한다.
하지만 휴가는 근로자의 권리다. 근로기준법은 연차휴가의 사용 및 목적에 관한 제한을 두지 않는다. 사용자는 연차휴가를 근로자가 청구한 시기에 주어야 한다고 명시해 근로자의 ‘시기 지정권’을 인정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도 지난해부터 ‘휴가 사유 없애기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동참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KT&G는 지난해부터 휴가 신청 시 ‘사유 기입란’을 없앴다. 상사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다. 휴가 시스템에 원하는 날짜만 입력하면 자동으로 ‘통보’된다. 류광훈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죄책감 없이 휴가 갈 수 있도록 휴가자 대체인력 보완 등 휴가 취득 환경을 만들어 주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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