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땅엔 ‘직훈족’도 있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2일 03시 00분


[문재인 시대/청년에게 일자리를/청년이라 죄송합니다]2부 ‘노오력’ 내비게이션
열네 번째 이야기… 취업 준비하는 ‘高4’ 86만명 “능력중심 세상 정말 올까요?”

《 지난해 인천 문일여고를 졸업한 민지애 씨(19·삽화)는 졸업생 중 유일하게 한국폴리텍대(컴퓨터응용기계설계과)에 입학했다. 중위권 성적의 민 씨가 4년제 대학을 포기하고 전문대에 입학한 이유는 단 하나, ‘취업’ 때문이다.

언니(24)의 영향이 컸다. 언니도 폴리텍대를 졸업하고 반도체 회사에 들어가 4년째 일하고 있다. 폴리텍대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운 결과 정규직에 연봉은 3000만 원이 넘는다. 언니의 ‘성공’을 본 가족도 전문대를 가겠다는 둘째의 선택을 막지 않았다.

폴리텍대 학생들은 자신들을 ‘고4’라고 부른다. 고3 못지않은 학습량 탓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반까지 수업과 실습이 쉼 없이 이어진다. 그래야 자격증을 딸 수 있다. 쉬는 날까지 보강을 듣다보면 일주일이 훌쩍 간다. 특히 문과 출신인 민 씨는 동기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 한다. 친구들이 즐기는 캠퍼스의 낭만은 포기한지 오래다.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먼저 취업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어요.”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인 민 씨도 걱정이 많다. 업종 특성상 여성을 잘 뽑지 않고, 경력을 선호한다. 작은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중견기업으로 옮겨가야 한다. 문제는 큰 회사일수록 비정규직을 선호한다는 점. 여성 전문대생의 고민과 비정규직에 대한 두려움까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민 씨는 진작 ‘어른’이 돼버렸다.

“이 땅에 ‘직훈족’(전문대나 직업전문학교에서 직업훈련을 받는 청년들)이 있다는 것도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고용 안정’은 물론이고요!”

특별취재팀 angryboard@donga.com 》

“이제 조용히 합시다. 휴대전화는 끄든지 집어넣으세요.”

강의실에는 적막감만 흘렀다. 숨죽이고 집중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강의에 집중했다. ‘회전명령’ 같은 어려운 말과 낯선 기호에 정신이 혼미해졌고, 졸음까지 밀려 왔다.

기자는 지난달 13일 서울 용산구 한국폴리텍대의 컴퓨터응용기계설계 전공 수업인 3차원(3D) 모델링 수업을 ‘직훈족’(전문대나 직업전문학교에서 직업훈련을 받는 청년들) 36명과 함께 들었다. 직훈족의 고난과 어려움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인문계를 전공한 기자가 이공계 기술 수업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민지애 씨(19·여)는 달랐다. 민 씨도 인문계 고교의 문과 출신이지만 수업시간 내내 연방 고개를 끄덕였다. 쉬는 시간에도 도면을 그리느라 컴퓨터 앞을 뜨지 않았다. 민 씨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도면을 그려 나갔다.

“어차피 (도면을) 완성해야 집에 가거든요. 쉬는 시간에도 계속해야죠 뭐.”

기자가 “분위기가 고등학교 같다”고 묻자 민 씨는 “그래서 저희 별명이 ‘고4’다”라며 웃었다. 오후 1시부터 내내 이어진 수업은 6시가 돼서야 끝났다. 청년의 특권이라는 캠퍼스의 낭만은 이들에게 사치였다. 이곳은 캠퍼스가 아니라 전쟁터였다.

○ 직훈족도 청년이다

“노동법도 법인데 왜 그렇게 안 지키는 건지 모르겠어요.”

민 씨보다 두 살 많은 동기 박수진 씨(21·여)가 대뜸 말했다. 인문계 고교 졸업 후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다. 월급 30만 원을 약속받았지만 6개월 동안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열정 페이’였다. 고용노동부에 전화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용증명을 보냈더니 받아야 할 월급의 50%만 돌아왔다. 백화점 화장품 매장에서도 1년 일했다. 단골들도 고졸 직원은 함부로 대했다. 원래 꿈이었던 쇼핑호스트직을 알아봤지만 고졸자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래서 올해 폴리텍대에 들어왔다. 취업률이 좋다는 기계설계 전공을 택한 것도 오로지 취업 때문이다.

전문대생(약 70만 명)과 국비지원 훈련생(약 16만 명)을 합치면 국내 직훈족은 86만 명에 이른다. 직훈족 중 민, 박 씨처럼 고용부 소속 국립대학으로 취업률이 80%를 웃도는 폴리텍대에 다니거나 국비지원 훈련을 받는 학생들은 그래도 사정이 좋은 편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 들어 ‘능력중심사회’ 정책이 강하게 추진되면서 전문대와 직업훈련에 대한 투자와 지원이 대폭 늘어났다. 인문계와 고졸자 훈련이 확대되고 있어 별다른 기술이 없고 스펙이 부족하다면 국비지원 훈련을 받고 취업에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민 씨의 언니도 폴리텍대를 나와 연봉 3000만 원의 정규직으로 4년째 일하고 있다.

하지만 천차만별인 직업훈련은 잘 골라야 한다. 지방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김모 씨(26)는 취업을 유예하고, 컴퓨터프로그래밍 직업전문학교를 다녔다. 국비 지원이라 무료였고 취업도 잘된다고 했다. 수업은 상당히 어려웠다. 석 달이 지나자 수강생은 반 토막이 났다. 어렵다고 호소해도 더 가르쳐 주는 건 없었다. 학교 측은 공짜 수업이니 만족하고 다니라는 식의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

○ 청년 상대 장사하는 사설 직업교육

국비지원 훈련이 이공계 기술훈련에 집중되다 보니 사설 직업학교로 몰려 피해를 보는 청년도 적지 않다. 항공사 승무원 학원과 아나운서 학원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올해 2월 서울의 한 사립대를 졸업한 장모 씨(26·여)는 140만 원 정도를 한 번에 내면 붙을 때까지 다닐 수 있다는 승무원 학원을 다녔다. 처음에는 담임이 붙어서 시간표부터 공채 일정까지 챙겨줬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자 담임에게 문자로 질문해도 답이 잘 오지 않았다. 담임도 수시로 바뀌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석 달째부터는 그만둬도 환불이 불가능하다고 약관에 명시를 해뒀던 것. 수업 시간에는 화장법 면접법 등을 배웠지만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석 달 만에 그만뒀고, 환불도 받지 못했다.

이런 직훈족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학력별 임금 격차와 사회적 대우다. 상당수의 전문대생과 고졸 훈련생들은 중소기업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해 저임금에 시달린다. 김진모 서울대 교수(산업인력개발학)는 “중학교 단계에서 진로 지도가 이뤄져서 대학을 가지 않는 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바로 직업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궁극적으로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왜곡을 개선해 임금 격차 등을 줄여 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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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은지 기자 wiz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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