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기술혁신 촉진법은 2001년 5월 제정돼 그해 11월부터 시행됐다.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자금이 부족해 성장하지 못하는 중소기업들을 지원하기 위한 법이다. 법 제15조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 발굴 및 육성’과 관련한 내용이다. 그런데 2007년 8월 제15조 2항(현재는 3항)에 ‘경영혁신형 중소기업’이라는 뜬금없는 용어가 추가됐다. 기술혁신형 기업과는 별개로 최고경영자의 리더십, 마케팅 혁신, 조직 혁신, 매출액 증가율, 부채비율 등을 평가해 정부가 인증하겠다는 것이었다. 법 취지와는 분명 동떨어져 있다.
배경은 이러하다.
2005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3만 개의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을 육성하겠다”고 했다. 정부는 4조5000억 원의 정책자금 중 절반 이상을 기술혁신형 기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중소기업계는 잔뜩 고무됐다.
문제는 과도하게 높은 목표치였다. 기술혁신형 중소기업 증가 속도는 대통령의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2005년 말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은 1만 개 수준으로 집계됐다. 2003년 말 7500여 개에서 2년간 2500개 안팎 늘어나는 데 그쳤다. 참여정부 임기가 2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3만 개란 목표 달성은 불가능해 보였다.
청와대의 독촉에 중소기업청은 ‘경영혁신형 중소기업’이란 아이디어를 내놨다. 기술혁신형 요건을 충족할 중소기업이 많지 않으니 경영혁신으로 범위를 넓혀 목표치를 달성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묘수라기보다는 꼼수에 가까웠다.
중기청으로부터 용역을 받은 한국생산성본부가 수개월에 걸쳐 평가 기준을 만들었다. 눈치가 없었던지 생산성본부는 매출액 증가율, 영업이익률 개선도, 부채비율 등을 망라한 지나치게 까다로운 평가표를 가져왔다. 자문단에 참여한 교수들이 “웬만한 대기업도 못 맞출 조건”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생산성본부의 평가표는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2006년 4월 신용보증기금이 기준을 완화한 새 평가표 작성 임무를 맡았다. 신보는 2주 만에 뚝딱 결과물을 제출했다. 중기청은 그해 7월부터 경영혁신형 중소기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뒤 지원 근거가 될 만한 조항을 기존 법에 슬쩍 끼워 넣었다. 중소기업 기술혁신 촉진법에 ‘경영혁신’이란 단어가 들어간 전말이다.
올해 5월 말 기준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은 1만8000개, 경영혁신형 중소기업은 1만5000개 정도다. 시기가 10년 가까이 지체됐지만 3만 개라는 숫자는 채운 셈이다. 그렇다면 이를 성공한 정책이라고 봐야 할까. 2006년 경영혁신형 중소기업 논의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경제에 실질적 도움이 되기보단 정책을 위한 정책의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중기청 생산기술국의 올해 예산은 1조 원 정도다. 이 중 9000억 원 정도가 연구개발(R&D) 지원 예산이다. 기술혁신형 중소기업은 정부 프로젝트 참여 시 가점을 받아 유리한 점이 있다. 경영혁신형 중소기업도 신보 보증료 0.1%포인트 할인, 정부 조달사업 참가 시 1.5점 가산점 등의 혜택이 있다. 하지만 이 기업들은 대부분 R&D 기능이 없어 도전할 프로젝트도 딱히 없다. 경영혁신형 중소기업 사이에서는 “기술혁신 촉진법에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는 자조가 나온다.
이명박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이렇듯 숫자만 앞세운 ‘허울뿐인 정책’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막 출범한 문재인 정부도 마찬가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차별 해소, 중소기업 성장, 미세먼지 문제 해결 등 난제들을 풀어내려면 의욕보다는 정교함이 더 절실하다. ‘속도전’이라는 말로 부실한 정책들을 밀어붙이는 것이야말로 새 정부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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