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한국GM 인천 부평공장 근처에서 만난 직원들은 노동친화적인 정부나 ‘강성, 귀족’이란 수식어가 붙는 자신들의 노조에 별 기대감이 없었다. 대신 이런 말을 했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건 좋다. 그렇지만 갈등을 감수하면서 한정된 파이를 새로 정규직이 되는 사람에게 나눠주진 못할 것이다. 결국 근로조건 개선 여부는 개별 기업의 수익성에 달렸다.” 노사정 어디서도 이런 현실론을 들어본 적이 없다.
노사 악몽의 날이 된 5·29
내가 부평을 찾은 지난주 초는 재계나 노동계나 모두 힘든 날이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한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을 문재인 대통령이 비판하면서 경총은 대책회의까지 열어야 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 한국GM의 전 노조지부장이 채용장사를 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1심보다 6개월 많은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은 것도 그날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날 더 망신스러웠던 쪽은 노동계다. 노조가 기득권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사실이라고 노조 스스로 치부를 드러냈다. 장기근속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토록 해달라거나 기업이 적자를 내도 통상임금의 500%를 성과급으로 달라는 게 한국 노조의 현실이다. 여론의 비판을 뻔히 알지만 대기업 노조는 이미 스스로 제어할 힘을 잃었다. 논리 싸움에서 불리하면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줄줄 늘어놓으며 논점을 흐리지만 귀족이 된 노조가 할 말은 아니다. 대기업 노조가 신성한 노동의 권리를 대변하는 진보세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특권에 집착하는 수구세력이 된 지 오래다.
노조에 박근혜 정부와 재계는 ‘양보하라, 반성하라, 희생하라’고 압박했다. 이기심을 버리고 성자가 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노조가 자신의 밥그릇을 놓지 않으려는 게 당연한데 소귀에 경을 읽었다.
한국 경제에서 독과점적 지위를 누린 기업 중 상당수가 노조와 이익을 나누면서 묵시적 담합 구조를 만들어온 게 사실이다. 한국GM 전·현직 임원들이 노조 간부의 채용 청탁을 받고 응시자의 성적을 조작한 것이 담합 구조의 비린 단면이다. 임원들은 “노조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검찰에 진술했다. 이 아픈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노동개혁을 추진했으니 ‘네가 먼저 양보하라’는 소모적이고 어리석은 줄다리기만 반복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경총 부회장의 지난주 발언은 비정규직 문제를 풀 수 있는 중요한 단초였다. 노동자의 신분에 따른 임금 차이를 줄여야 노조의 힘을 빌려서라도 대기업의 기득권에 무리하게 들어서려는 사람이 줄고 그 결과 노동유연성이 높아진다. 그러면 기업도 굳이 비정규직을 쓸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경총 부회장의 잘못이 있다면 보수정권 때와 똑같은 방법과 논리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 점이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바람에 격차 해소의 중요한 해법이 사장(死藏)될 위기다.
무리한 대기업 증세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방식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파이를 뺏기는 쪽의 상실감이 파이를 얻는 쪽이 느끼는 행복감보다 커서 사회 전체로 손실이다. 정부가 무차별적인 정규직화로 파이를 나누기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경총이 일자리委에서 말하라
긍정적인 사실은 알려진 것과 달리 경총이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에 포함됐다는 점이다. 소통의 여지가 있다. 경총이 격차 해소의 해법을 선제적으로 제시하기 바란다. 유효 기간 5년짜리 의미 없는 상생협력이 아니라 귀족노조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재계가 먼저 양보하는 타협안이어야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