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종일 도서관에서 스펙을 쌓는다. 한번 쓰고 버려지는 ‘티슈 인턴’임을 예감함에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원서를 넣는다. 오늘도 청년들은 ‘노오력의 배신’(1부)을 겪는다. “노력의 방향과 방법이라도 알려 달라”는 청년들의 요구에 ‘취업 내비게이션’(2부)도 가동했다. 이젠 취준생 개인을 넘어 기업과 노동시장, 나아가 우리 사회가 어떤 청년 일자리를 만들고 활성화할 것인지, 청년들의 요구가 정치와 정책에 어떻게 반영돼야 하는지를 5회에 걸쳐 알아본다. 그들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지 않고 사회 안으로 온전히 ‘귀환’(3부)시키기 위해서다. 첫 번째로 청년이 진짜 원하는 일자리를 탐험했다. 새 정부의 일자리 만들기에 시사점이 되길 바란다. 》
2017년 대한민국은 근심이 있다. 청년들이 꿈꿨던 보물 ‘워라밸’(워크 앤드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로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함)이 사라진 것. 보물을 잃은 청년들은 고시원과 빌딩 숲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다. 이제는 그런 보물이 정말 있는지조차 다들 의심하는데…. 서울에서 464km 떨어진 섬 제주가 고용률 70%를 돌파하며 워라밸을 만들었고 청년들이 이를 발견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은 워라밸이 정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제주로 갔다.
○ 서울 토박이가 제주로 온 이유
지난달 3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제주신화월드. 두꺼운 철문이 양쪽으로 열리자 분수가 쉼 없이 물을 뿜었다. 넓게 펼쳐진 정원은 야자수로 가득했다. 흡사 남태평양 리조트 같은 이곳은 250만 m²의 부지에 외국인 카지노와 테마파크까지 건설 중인 복합리조트다. 투입된 자본만 외국 자본까지 합해 2조5000억 원에 달하는 제주의 ‘대기업’이기도 하다.
“직원의 30% 정도가 외국인이고, 영어와 중국어로 처리할 업무가 많은 편이에요.”
인사팀 사원 김철규 씨(25)가 사무실 게시판에 걸린 각종 외국어 문서를 보여주며 말했다. 서울 토박이인 김 씨는 제주에 연고가 없다. 하지만 전공을 살릴 수 있고 매일 여행하는 기분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그는 “또래인 동료가 많아 주말에 축구도 같이 하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도 직장이고, 조직 생활인데 힘든 점은 없을까.
“스트레스가 없진 않죠. 그래도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가슴이 뻥 뚫려요.”
막상 살아보니 제주 생활은 정말로 심심할 틈이 없다. 주말이면 근처 오름을 오르고 바다낚시도 간다. 서울 친구들이 그리우면 훌쩍 비행기를 탄다. 제주에 워라밸이 출몰했다는 첩보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러나 표본이 더 필요했다.
○ 디지털 노마드로 일한다
야트막한 돌담이 펼쳐진 서귀포시 월평동의 한 마을.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걸으니 서핑보드 두 대가 세워져 있는 건물이 나왔다. 두 번째로 발견한 워라밸의 흔적이다.
이곳에서 콘텐츠업체 ‘카일루아’를 운영하는 소준의 대표(31)가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다. 서핑을 즐기는 탓인지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 털이 보송보송한 강아지 세 마리와 함께였다.
“카일루아는 ‘두 개의 해류가 만나는 곳’이란 뜻이에요. 다양한 능력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재밌는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카일루아는 개인의 취향을 분석해 제주도 여행 코스를 짜주는 콘텐츠 정보기술(IT) 회사다. 힐링을 선호하는 사람에겐 ‘고요한 나 혼자 여행’ 일정을, 연인과 함께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에겐 ‘레포츠 중심 커플 여행’ 일정을 짜주는 식이다. 소 대표를 포함해 청년 5명이 근무하는데 제주 토박이 1명을 빼면 모두 육지 출신이다. 전공은 컴퓨터공학 독어독문 불어불문 신소재공학 등 다양하다.
카일루아는 사무실과 근무시간이 없다. 일하고 싶을 때 원하는 곳에서 일한다. 중문해변에서 일하거나 침대에 누워서 일하기도 한다. 윤정욱 씨(28)는 “오전 10시에 알람을 맞춰두고 11시쯤 일어난다”며 “이전 직장의 스트레스가 8∼9점이면 여기는 1∼2점”이라고 말했다.
카일루아는 ‘디지털 노마드’(인터넷이 연결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일하는 문화)를 지향한다. 직원들은 최근 소 대표를 따라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시간에 일하면서 서핑까지 할 수 있다니. 제주로 온 청년들의 가슴엔 분명 워라밸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제 쐐기를 박기 위해 마지막 청년들을 찾아 나섰다.
○ 하루가 있는 삶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의 ‘단추스테이’. 노남경(40) 김세정 씨(36)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다.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자 부부가 막 수확한 양파를 담아둔 박스가 보였다. 그림으로 장식된 건물 외벽에는 부부의 손길이 물씬 묻어났다.
“금잔화가 밤에는 꽃망울을 오므렸다가 낮에 활짝 피는 걸 여기 와서야 알았어요.”
부부는 6년 전 제주에 정착했다. 그전에 남편은 재무설계회사, 아내는 공익재단에서 일했다. 직장생활이 크게 불만스럽지는 않았지만 사람 냄새 나는 삶을 위해 고민 끝에 제주행을 결심했다.
정부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했다. 중소기업청의 ‘나 사장 프로젝트’를 통해 1000만 원을 지원받았고 직업훈련사업으로 바리스타와 양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건물은 폐가를 보수하는 조건으로 무상 임차했고 인테리어는 직접 했다. 게스트하우스 이름은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재료를 십시일반 모아 수프를 만들어 나눠 먹었다는 동화책 ‘단추수프’에서 따왔다.
조용하고 주인 부부의 인심이 따뜻한 곳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5년간 다녀간 손님만 총 3000여 명. 서울에 있을 때보다 소득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돈 쓸 데는 더 많이 줄어 부족하지는 않다. 부부는 방문한 손님의 이름으로 유니세프에 모기장을 기부하고 있다.
물론 제주 생활이 마냥 편한 건 아니다. 아이가 생기니 병원이 부족한 게 제일 힘들다. 숙박업소가 우후죽순 생겨나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래도 노 씨는 “어려운 점도 있지만 ‘저녁이 있는 삶’이 아니라 ‘하루가 있는 삶’이라 즐겁다”고 말했다.
회사원부터 창업가까지 다양한 청년이 모인 제주는 그야말로 워라밸의 보고(寶庫)였다. 도시 한복판 고시원과 빌딩 숲에 갇힌 청년들도 워라밸을 하나씩 품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라며 탐사보고서를 쓰기 위해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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