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에게 일자리를/청년이라 죄송합니다]3부 ‘노오력’의 귀환
캐나다, 업계 커뮤니티 활발… 직장 옮길때 정보 얻기 쉬워
싱가포르, 양질 일자리 풍부… 이직 원활한 대신 평가는 엄격
한국은 아직도 공채문화 강해
‘현 직장에서 정년까지 근무할 의사를 굳히고 있는 직장인은 10명 중 1명꼴밖에 되지 않아 우리 사회의 평생직장 풍토는 여전히 성숙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2년 10월 6일 동아일보 7면 기사의 첫 문장이다. ‘한평생 한 직장’을 바른 가치와 미덕으로 여겼던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평생직장에 대한 믿음과 문화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가 첫 직장에 두는 가치는 강력하다. 청년들이 재수, 삼수, n수를 하며 취업준비생 신분을 맴도는 이유이기도 하다.
작은 곳에서 시작하더라도 ‘이직의 사다리’를 통해 더 나은 곳을 찾는 것. 이는 첫 직장 진입 시기가 계속 늦춰지는 한국 사회 문제의 해결법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2013년 LG경제연구원은 이를 가리켜 ‘잡 호핑(job hopping)’이라고 표현했다. 영미권에선 ‘지나치게 잦은 이직’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통하지만, 한국에선 구직문화의 변화를 상징하는 신조어로 쓰인다.
○ 이직의 명암
이직은 많은 직장인의 꿈이다. 취업포털 커리어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3개월 내’ 이력서를 업데이트한 경험이 있는 직장인은 54%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9년 전 중소기업에 입사했던 양모 씨(38)가 이에 해당한다. 그는 ‘계속 대기업만 준비하느니 작은 곳에서부터 경력을 쌓아 이직하겠다’고 결심하고 H사에 들어갔다. 묵묵히 갈고닦은 내공은 표가 났다. 2년 차이던 2009년 그는 SK하이닉스 파견직으로 일할 기회를 얻었고, 2년 뒤엔 정규직 이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같은 업무를 하고도 중소기업, 계약직 직원이란 이유로 적은 돈을 받는 게 아쉬웠다”면서 “그래도 작은 회사에서 실무를 훈련한 덕에 대기업에 입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모두가 성공적인 이직의 꽃길을 밟는 건 아니다. A 씨(30)는 5년간 3번 스카우트되며 이름난 정보기술(IT) 업체에 입사했다. 젊은 개발자들 사이에선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곳이다. 바닥부터 달려온 꿈이 결실을 맺는 듯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전 직장에서 ‘동종업계 이직 금지’ 규정을 내밀어 소송을 걸었다. 이직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여전히 힘겨운 법정 싸움 중이다.
○ 이직, 아직도 먼 사다리
A 씨의 발목을 잡았던 ‘이직 금지 규정’은 당연한 것일까?
2013년 캐나다로 이민 가 현지에서 이직을 거쳐 게임업체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37세 동갑내기인 황주보 이미현 씨 부부의 답은 “노(no)”다. 이 규정은 핵심 기술을 가진 특수 인력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될 뿐, 일반 사원에게 악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황 씨는 “캐나다는 이직에 필요한 제도와 문화가 갖춰진 곳”이라고 말했다. 이직을 위해 잠시 실직 상태에 놓이면 주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다. 단, 주마다 평균 이직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해 그 개월 수만큼만 지원한다.
지역 내 업계 커뮤니티도 활발한 편이다. 같은 업계 종사자끼리 이직 정보를 나누고,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어 이직 기회를 얻기 쉽다. 15년 차 헤드헌터 임정우 씨는 “이직할 때 구직 정보를 얻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며 “업계 커뮤니티는 그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지난해 외국계 회사로 이직한 B 씨(32)는 “팀원들이 이직자와 일대일 미팅을 하는 게 의무라는 게 놀라웠다”며 “공채 기수문화가 강했던 한국 기업이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 이직은 ‘과정’이다
책 ‘당신의 이직을 바랍니다’의 저자 전하늘 씨(29)는 2011년 편도 티켓을 끊어 싱가포르로 떠났다. 첫 직장은 작은 헤드헌팅 업체.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지만, 고객 모집에 성공해 1년 뒤 억대 연봉자가 된다. 이후 다국적 IT 회사 ‘링크트인’을 거쳐 현재 글로벌 제조업체의 아시아 본부 어시스턴트 브랜드 매니저라는 꿈을 이뤘다.
한국에서도 대기업에 다녀본 그녀는 “보통 ‘이직’과 함께 ‘고용 유연화’라는 말이 등장하지만, 한국엔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고용과 해고만 쉬워진다면 사회의 부담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허브답게 싱가포르에는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 구직자의 선택 폭이 넓은 편이다.
이직의 사다리가 풍부한 싱가포르는 그 대신 실적평가가 엄격하다. 근로자는 커리어 계획과 관련된 경험과 성과를 쌓고, 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전현선 쿠팡 기술 리크루터는 “어떤 성과를 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평가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하늘 씨는 “직업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며, 이직은 강점을 바탕으로 그 수단을 고르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연고도 없는 싱가포르에서 그가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바로 ‘이직의 사다리’ 덕분이었다. 그는 “한국의 청년들에게도 꿈을 향한 사다리가 다양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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