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상공회의소에서 브리지트 셸레 직업교육국장을 만난 건 한국에서 노동개혁의 모델로 하르츠 개혁 열풍이 불던 2015년 10월이었다. 한국의 성과주의 정책을 지지할 것 같던 셸레는 “장년층을 공경하는 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런 정책이라니” 하며 신기해했다. 독일식 직업교육을 한국이 도입했다 하니 “‘틀’을 가져가기는 쉬워도 중세로부터 내려온 ‘문화’를 가져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노동개혁은 문화개혁이라는 의미를 그때는 읽지 못했다.
임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노동유연성을 높인 하르츠 개혁이나 고용안정을 이룬 네덜란드의 바세나르 협약 전에 각국이 노동자의 신분 문제로 진통을 겪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새 정부의 비정규직 정책이 논란만 거듭하는 것은 일자리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변죽만 울리기 때문이다.
2012년 초 당시 이순우 우리은행장은 청원경찰이던 정민혁 씨를 정규직으로 채용했다. 문재인 정부가 공약으로 내건 기간제 근로자까지 포함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5년 전 시중은행이 먼저 해냈다. 은행으로서는 고졸 채용을 장려한 이명박 정부에 잘 보이려는 계산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동전자루 짊어지고 기계 고치고 진상 손님에게도 늘 웃었던 노력파 흙수저 한 명을 발굴했다.
정 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찾아봤다. 서울 상암동 수신업무센터에 있는 그는 정규직이 되니 급여나 복지 혜택이 늘었느냐는 상투적인 질문에 “그보다 기회가 늘었다”고 했다. 우리은행은 업무 성격에 따라 사무직군, 개인서비스직군, 개인금융직군으로 일자리를 나눈 뒤 직군별 급여를 달리한다. 정 씨는 특채로 입사한 덕분에 가장 높은 개인금융직군 사다리에 발을 올렸고 이제 더 올라갈 꿈을 꾸고 있다. 비정규직 때는 몰랐던 기회가 주는 희망이 즐겁다고 했다.
정부가 일자리정책을 추진하면서 급여와 복지뿐 아니라 기회의 의미도 생각해 봤는지 의문이다.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기회를 독점하고 있는 기득권 때문이기도 하다. 새로운 형태의 일자리가 생길 때 유사 직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반발하는 풍토가 있다. 척추치료사 스포츠재활의사 독립금융상담사 등 좋은 서비스 일자리가 외국에만 있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은 기득권의 저항이 거세서다.(정대영 송현경제연구소장)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급여 수준을 맞추는 데 초점을 두면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기존에 있는 정규직군과 다른 정규직군을 따로 만들어 비정규직을 여기에 편입시키는 아이디어가 있다. 임금 차별이 생기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직군 간 이동이 가능하게 하면 비정규직에 기회의 문이 열린다.
정치인과 관료들이 이런 기회의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로 기회가 간절했던 적이 별로 없다. 장관이나 국회의원 중에 자녀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장관 연금부터 깎으시라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에 참여하는 정부, 기업, 노조는 모두 크고 작은 기득권 위에 있다. 먹고사느라 바쁜 하위 10%는 ‘헬조선’ 논쟁 자체를 모른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호리병을 거꾸로 세워둔 것처럼 정규직 기득권이 뚱뚱하게 윗부분을 차지하고, 소외된 일부 비정규직이 병 아래에 머무는 기형적 사회가 될 것이다.
호리병을 흔들어 병 안의 물을 섞으며 기회가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공공 부문 정규직을 늘리려면 장관 연금과 공기업 임원의 급여부터 깎으라. 그래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여지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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