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최태원 회장(사진)의 ‘실리 경영’이 돋보인 승부였다. 21일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컨소시엄이 일본 도시바메모리 매각의 우선인수협상자로 선정된 것을 두고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는 ‘성공적인 역전극’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SK하이닉스는 베인캐피털이 설립하는 특수목적회사(SPC)에 3000억 엔(약 3조1000억 원)의 자금을 공급하는 형태로 참여한다.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은 인수금액으로 총 2조1000억 엔(약 21조6000억 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초 일본 도시바메모리 인수전에서 SK하이닉스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다소 부정적이었다. 도시바는 반도체 업계 최초로 메모리반도체의 일종인 낸드플래시를 상용화했고, 글로벌 시장 점유율에서 10위 안쪽을 꾸준히 유지했다. 일본 경제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인 도시바를 한국 기업에 넘길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단순히 돈을 주고 도시바를 사겠다는 뜻이 아니다. SK하이닉스, 도시바메모리 양사뿐 아니라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이익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주길 바란다.”
최태원 회장은 4월 일본 도시바 본사를 찾아 이번 매각 작업을 이끈 쓰나카와 사토시(綱川智) 사장을 직접 만났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의 목적은 도시바의 경영권이 아니라 양사의 시너지, 반도체 시장 이해관계자들의 실익임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SK하이닉스는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 구성이라는 해법으로 성공을 거두게 됐다. “기술 유출 우려가 있으니 한국, 중국 특정 기업에 매각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일본 반대 여론도 피했다.
SK하이닉스는 경영권이나 지분을 가지지는 않는다. 국내 반도체 업계 및 일본 언론 보도를 종합해보면 일본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INCJ)가 1%라도 더 가져가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확보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반도체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의 ‘실익’이 크다고 평가한다. 급격한 성장이 예상되는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뉴 플레이어’의 진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미국 통신 반도체 업체 브로드컴, 애플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는 폭스콘을 계열사로 두고 있는 대만 훙하이(鴻海)그룹 등도 도시바메모리 인수에 눈독을 들였다. 이들은 글로벌 낸드플래시 점유율 2위이자 원천기술을 갖고 있는 도시바메모리 인수를 통해 단숨에 시장 진입을 노렸었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나 중국 등의 특정 기업이 도시바메모리를 손에 넣고,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물량공세를 벌이는 ‘치킨게임’ 양상이 벌어질 경우 SK하이닉스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밖에 도시바메모리 인수에 일정 부분 참여함으로써 미래 전략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도 SK하이닉스로서는 큰 수확이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도시바메모리 인수 유력 후보로 꼽혔던 미국 반도체 회사 브로드컴은 대규모 구조조정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고배를 마셨다.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은 이날 일본 현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은) 기술 유출 방지와 고용 확보 등 일정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어 환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메모리반도체 양대 축은 D램과 낸드플래시다. 글로벌 D램 시장은 삼성전자(시장점유율 48%)와 SK하이닉스(23.2%)가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시장점유율 35.4%·1위)가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SK하이닉스(10.1%·5위)가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바메모리(19.6%) 인수에 일정 부분 참여하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코리아 파워’를 더욱 강화할 수 있는 디딤돌을 놓게 됐다.
넘어야 할 산은 남아 있다. 도시바와 반도체를 공동 생산해 온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은 ‘동의 없는 매각은 안 된다’며 국제중재재판소에 중재를 신청한 상태다. 컨소시엄 측은 이에 대해 계약 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돈을 내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일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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