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장수 기업 중 한 곳인 전방(옛 전남방직)이 최저임금 인상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공장을 폐쇄키로 했다. 많으면 600여 명이 한꺼번에 일자리를 잃게 된다. 불황과 생산성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던 기업이 임금 인상 충격에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선 것이다. 전방은 1935년 광주에서 가네보방적으로 시작한 국내 대표 섬유기업이다.
20일 전방과 재계에 따르면 전방은 자사가 전국에 보유한 섬유공장 6곳 중 3곳을 폐쇄하고 근로자 600여 명을 해고하는 구조조정안을 최종 검토하고 있다. 현재 2곳의 폐쇄와 250여 명의 인력 감축은 노조의 동의를 얻어 사실상 확정됐다.
조규옥 전방 회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생산효율성을 높여도 내년도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생존할 수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중년의 주부가 대부분인 근로자들을 해고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방을 20여 년간 경영한 조 회장은 19일 공장 폐쇄와 해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전방은 동종업계 기업들이 사업을 접거나 해외로 이전할 때도 국내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최근 수년 동안 약 1300억 원을 쏟아부어 자동 설비를 들여놨다. 정부의 ‘유턴정책’에 맞춰 1996년에 인도에 600억 원을 투자해 설립한 공장설비도 한국으로 다시 돌리면서 일자리를 유지했다.
하지만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16.4%로 결정되자 버틸 여력이 없어졌다. 이 회사 인건비는 연간 220억 원가량으로 매출의 10%를 훌쩍 넘는다. 전체 직원 1000여 명(자회사 제외) 중 내년부터 최저임금 적용을 받는 직원은 600여 명. 이들에게 인상분을 적용하면 연간 25억 원이 추가로 든다. 연간 적자가 100억 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감내하기 어려운 규모다. 최저임금 인상 직후인 16일 정부가 임금 인상에 따른 기업 보전책을 내놨지만 30인 미만의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에 국한돼 이 회사는 정책 사각지대에 있다.
전방의 이번 결정으로 월평균 약 235만 원(각종 수당 포함)을 받던 근로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됐다. 섬유업체 특성상 전체 직원의 80%가 여성이고 이 중 90%가량이 재취업이 어려운 중년의 주부다.
전방과 일본의 세계적인 섬유업체인 군제 등이 1972년 합작해 설립한 전방군제도 사실상 사업을 포기했다. 이 회사는 전방이 50%의 지분을 갖고 군제(35%)와 미쓰이물산(15%)이 투자해 한국에서 속옷 등을 생산해왔다. 생산량의 95% 이상을 일본 군제로 수출하던 이 회사는 올해 상반기(1∼6월)부터 한국의 임금 인상을 우려해왔다고 한다. 유력 대선후보가 최저임금 1만 원을 공약하자 일본 측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전방 측은 올해는 많이 올라야 10% 인상이 될 것이라며 군제 측을 설득했다. 하지만 16일 최저임금 인상안이 확정되자 일본 측 대표(전방군제 부사장)는 사직서를 쓰고 일본으로 떠났다. 군제는 한국에서 생산하던 물량을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산업계에서는 전방의 사례처럼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 국내 한계기업 구조조정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5년 기준 3년 연속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조차 감당 못하는 한계기업은 3278개에 이른다. 이 중 상장기업은 232개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국내 기업들이 2020년까지 부담해야 할 추가금액은 81조5259억 원(2017년 대비)에 이른다고 최근 발표했다. 한계기업 상당수가 인력 감축을 포함한 구조조정에 착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 구조조정을 한 가지 요소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계에 봉착한 국내 기업들에 급격한 임금 인상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빌미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태 KAIST 경영대학원 교수는 “기업이 단기에 혁신해 수익성을 높이기는 어려운 만큼 노동 생산성이 낮은 유통 건설 부문에서도 구조조정이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구조조정으로 기업 생태계가 회복될 것이란 반론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인력 조정에 대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과당경쟁이 사라지면서 새 분야로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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