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갑으로 갑 때려잡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4일 03시 00분


김용석 산업부 차장
김용석 산업부 차장
요즘 대한민국에서 ‘갑질’만큼 무서운 죄목이 없다. 갑질로 한 번 입방아에 오르면 순식간에 일이 커진다. 한번 찍힌 낙인은 오래도록 지우기 어렵다. 사태의 전개는 대략 이렇다. ①황당한 갑질이 여론에 오른다. ②성난 ‘을’들이 일제히 갑을 성토한다. ③(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갑이 즉각 사과에 나선다. ④하지만 별 소용없이 비난만 커진다. 눈여겨볼 건 그 다음이다. 갑과 을이 직접 문제의 실마리를 푸는 장면은 보기 어렵다. ‘갑 위의 갑’이 등장해 을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갑을 엄중히 처단하는 스토리가 익숙하다.

갑 위의 갑은 누굴까. 한국에선 정부, 공공기관이다.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한국 재계 간판 기업인 삼성그룹 사람들이 경험한 얘기를 전한다. 삼성은 서울 태평로 본사에서 길 건너 북창동 방향으로 횡단보도 하나 놓아 달라는 민원을 몇 년 동안 해 왔다. 요지부동. 민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올 초 갑자기 횡단보도가 생겼다. 한국은행 본부가 태평로 삼성 사옥으로 임시 거처를 옮기면서다. 한국은행 단골손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북창동 상인들의 민원이 받아들여진 결과라는 얘기도 있지만, 어쨌든 삼성맨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횡단보도가 태평로를 가르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은행의 저력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다시 갑질 얘기로 돌아간다. 갑을 사이의 싸움에 갑 위의 갑이 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을은 더 이상 갑을 상대하지 않는다. 물론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한 회장님이나 공관병을 노예처럼 부린 장군님은 경찰이나 검찰, 군검찰 앞에 서는 게 맞다. 그러나 상호 간의 계약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경우는 좀 다르다. 최근 빚어진 프랜차이즈 사태가 대표적이다.

요즘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은 가맹본부를 상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슬 퍼런 갑 위의 갑 공정거래위원회와 직거래하는 편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음식 재료와 인테리어 공급선을 독점하고 비싼 가격을 덤터기 씌운 가맹본부의 갑질은 고쳐져야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원가를 공개하고 마진을 줄이라는 건 갑 위의 갑이 하는 또 다른 갑질이다. 갑이 을 무서운 줄 알아야 하듯이, 갑 위의 갑도 갑을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바탕인 시장경제 룰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가맹본부가 로열티가 아니라 재료값이나 인테리어값으로 돈을 벌어온 구조는 무형의 가치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려는 한국식 거래 관행 탓도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칼로 자르듯 갑 위의 갑이 내놓는 대증요법은 통쾌하다. 하지만 ‘갑으로 갑 때려잡기’로는 왜곡된 갑을 관계의 뿌리를 뽑지 못한다.

한국에서 갑질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계약사회 전통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수평적 계약 관계가 아닌 상하의 관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갑은 을에게, 을은 병에게 갑질 하는, 고질적인 병폐가 끊이지 않는다.

이참에 프랜차이즈 업계에서 재료 공급, 인테리어 공급의 병폐를 없애면서 동시에 브랜드 가치에 따라 제대로 로열티를 받는 정상적인 거래관계가 자리 잡아야 한다. 논의의 주체는 갑과 을이 아닌 동등한 계약자로서 나란히 선 가맹본부와 가맹점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정위는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처단하는 갑 위의 갑이 아니라 중재자라는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김용석 산업부 차장 yong@donga.com
#갑질#프랜차이즈#가맹점#계약사회#김용석#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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