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김영혁 코리아세븐 기획부문 상무는 미국 ‘아마존 고’ 소식에 깜짝 놀랐다. 아마존이 계산대가 없는 무인 점포를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도 준비합시다.”
코리아세븐은 편의점 세븐일레븐을 운영하는 롯데그룹 계열사다. 아마존 고 모델은 기술 수준과 비용이 너무 높아 바로 도입하긴 쉽지 않았다. 그 대신 코리아세븐 직원들은 올해 초 일본 오사카로 연수를 떠났다. 마침 일본 편의점 로손에서 파나소닉의 무인 계산대 ‘레지로보’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레지로보는 분명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고객의 ‘변심’까진 읽어내지 못했다. 장바구니에 이것저것 넣었다가 계산 직전 가격을 확인한 뒤 “이건 빼 달라”고 요구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김 상무는 “고객이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의미가 없다. 소비자 경험을 높이는 미래형 점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라고 말했다.
오프라인 점포가 변하고 있다. 변화의 중심에는 ‘계산대 혁명’이 있다. 계산대에서 물건의 바코드를 찍던 계산원이 사라지거나 아예 계산대가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계산대를 둘러싼 결제 시스템도 달라지고 있다. 유통, 정보기술(IT), 금융회사 간 합종연횡과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다. 누가 더 편리한 시스템을 구축하느냐가 핵심이다.
고객의 장바구니를 파악하라
3일 오전 스타벅스 서울 무교점. 주문한 음료를 찾아가라는 직원의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나온다. 10번 중 1, 2번은 ‘사이렌 오더로 주문하신 ○○ 고객님’이라는 식이다.
사이렌 오더는 스타벅스코리아가 2014년 5월 내놓은 선주문 서비스다. 스타벅스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주문하고 결제까지 마친다. 매장에 가서는 음료만 받으면 된다. 계산대가 스마트폰으로 옮겨 온 셈이다. 스타벅스코리아 관계자는 “하루 평균 5만5000건의 사이렌 오더가 들어온다. 전체 주문의 13% 수준”이라고 말했다.
음식점이나 커피전문점은 메뉴 종류가 적다. 무인 계산대 도입이 상대적으로 쉬운 이유다. 대형마트나 편의점은 사정이 다르다. 상품 수가 수천, 수만 개나 되는 상황에서 고객이 고른 물건을 정확히 파악해 물건 값을 계산해내야 한다. 유통업체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코리아세븐은 롯데카드, 롯데정보통신과 힘을 합치기로 했다. 마침 롯데카드가 손만 대면 결제가 되는 ‘핸드페이’ 기술을 개발한 터였다.
이들의 협업은 올해 5월 선보인 ‘세븐일레븐 시그니처’로 첫 열매를 맺었다. 이곳에는 기존 컨베이어 벨트 계산대에 초고속 360도 스캐너가 올려져 있다. 스캐너가 상품을 빠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보조 스캐너도 있다. 인공지능(AI) 기능까지 있다. 자신이 스캐닝한 상품의 부피, 이미지 등의 데이터를 계속 쌓아가면서 상품을 인지하는 정확도를 높여간다.
김 상무는 “오류를 줄이기 위해 꾸준히 시험 중이다. 최근 점주들이 당장 설치할 수는 없냐고 문의해 온다. 일본 편의점 업체들도 여러 차례 둘러보고 갔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은 경기 분당점과 서울 노원점에서 ‘스마트 쇼퍼’ 식품관을 운영 중이다. 이곳의 계산대는 고객용 단말기와 결제용 디지털 화면이 중심이 된다. 소비자는 장바구니를 들 필요가 없다. 단말기를 들고 다니며 원하는 상품의 바코드만 찍으면 된다. 결제는 무인 계산대에서 한다. 그럼 상품은? 백화점 직원들이 친절하게 집으로 배송한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전용 단말기를 쓰면 바코드가 잘 찍히고 계산 과정까지 부드럽게 연결될 수 있다고 봤다. 단말기 비용이 들더라도 더 많은 고객을 백화점에 오게 하려는 전략”이라고 했다.
신세계그룹은 올해 3월 편의점 위드미 코엑스점에 계산대에서 고객이 바코드를 직접 찍어 결제하는 무인 계산대를 선보였다. 신세계그룹의 다른 유통채널들은 스마트폰을 결제 도구로 쓰는 무인 계산대 도입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상품의 바코드를 찍고 신세계의 간편결제 시스템인 SSG페이로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물론 상품은 집으로 배달해준다.
금융사-전자회사-IT업체 결제 시장 쟁탈전
똑똑한 계산대가 상품을 효율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면 결제는 쇼핑의 마지막 단계다. 요즘 경쟁이 가장 뜨거운 시장이다. 결제 수단도 다양해졌다. 아직은 실물 신용카드가 대세지만 스마트폰이 강력한 대체자로 떠올랐다. 스마트폰을 매개로 한 간편결제 시장에는 수많은 플레이어가 뛰어들고 있다. 은행, 카드 등 기존 금융업체는 물론이고 유통(신세계, 롯데), 전자(삼성전자, LG전자), IT(네이버, 카카오) 업체들이 도전장을 내고 있다. 애플페이와 구글페이의 한국 상륙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국내 첫 간편결제 시스템은 2014년 9월 나온 카카오페이였다. 2015년 7월 신세계그룹의 SSG페이, 삼성전자의 삼성페이가 등장하면서 격전이 본격화됐다. 온라인 시장만 놓고 보면 가장 잘나가는 곳은 네이버페이다. 검색, 쇼핑, 결제가 한 번에 연결될 수 있어서다. 올해 1분기(1∼3월) 네이버페이를 한 번이라도 사용해 본 실사용자는 640만 명에 이른다.
오프라인에서의 간편결제 시장은 춘추전국이다. 삼성페이가 승기를 잡았지만 SSG페이 등이 무섭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 모바일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삼성페이 사용자는 올해 5월 한 달 동안 약 493만 명으로 파악됐다. SSG페이는 최근 앱 다운로드 400만 건을 넘어섰다. 롯데그룹 엘페이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 내 다운로드 수는 약 50만 건이다.
스마트폰이 실물 카드를 따라잡기에는 아직은 갈 길이 멀다. SSG페이 개발에 참여한 문준석 신세계I&C 플랫폼기획팀 팀장은 “연간 720조 원의 결제 시장 중 간편결제가 차지하는 비중은 1%도 안 된다. 아직은 소비자에게 실물 카드가 편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간편결제 사업자들은 고객 편의성을 늘리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찾고 있다. 신세계는 계산원의 질문 수에 주목했다. 이마트 계산원은 고객에게 쿠폰 여부, 결제 수단, 주차 인증, 포인트 적립 등 7, 8가지 질문을 하게 돼 있다. 스마트폰 속 SSG페이 바코드 하나만 보여주면 자사 유통 매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필요가 없도록 했다.
시장이 커지면서 합종연횡도 늘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미국 최대 온라인 결제 플랫폼 페이팔과 손잡고 미국 서비스를 시작했다. NHN엔터테인먼트의 페이코는 6월 현대백화점과 협력해 오프라인 가맹점을 늘렸다. 롯데그룹은 스타트업 모비두와 계산대에서 나오는 소리(음파)만으로 스마트폰 엘페이로 결제가 되는 서비스를 시범 운영 중이다.
문 팀장은 “결제는 습관이다. 향후 미래 점포의 변화와 더불어 소비자 편의를 높인 사업자가 주도권을 쥘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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