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과 베개가 널려 있는 좌판과 ‘냉장고 바지’라고 쓰인 골판지들 사이로 흥겨운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장 상인이 알려주는 대로 좌판을 지나 시장 중심부의 계단을 올라가자 ‘이거 레알(진짜냐)?’이라고 적힌 장난스러운 입간판부터 눈에 띄었다. 왁자지껄한 1층 시장과 달리 2층엔 따뜻한 노란 조명과 최신 아이돌 음악, 파스텔톤의 벽지들이 어우러진 도심 건물 안의 고급 식당가를 연상시키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달 초 찾아간 경기 수원 팔달구 영동시장 2층 ‘청년몰’은 평일 낮임에도 제법 분주했다.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단위 손님들이나 친구와 함께 온 2030세대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시나브로카레’ ‘눈칫밥’ ‘달토끼군것질’ 등 톡톡 튀는 글씨체와 캐릭터 간판을 단 9곳의 식당과 각종 문화상품 매장을 포함해 28곳의 청년 사업장이 개점 중이었다.
푸드코트 가장 앞쪽에 위치한 시나브로카레의 청년 사장 김중수 대표(32)를 만났다. 이준희 대표(32)와 둘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일본식도, 인도식도 아닌 한국식 카레를 내놓겠다’가 가게의 모토다. 대표 메뉴 중 하나인 탄두리카레세트에는 잘게 썬 청양고추가 올라가 있었고 양념치킨맛과 비슷한 맛이 나지만 맛있는 자체 소스와 깍두기도 곁들여 나왔다.
김 대표는 창업 전 한 프랜차이즈 컵밥 업체에서 일하며 메뉴 개발 교육을 받았다. 언젠가는 자신의 식당을 열겠다고 마음 먹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작은 레스토랑 부엌에서 2년간 일했다. 그때 ‘한국식 카레’로 창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원래 한국에서 먹던 레토르트 카레를 별로 안 좋아했는데, 일본에 가 보고는 ‘이런 카레도 있구나’ 처음 깨달았다. 나 같은 한국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고 이들에게 ‘맛있는 카레’를 알려주고 싶었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7월 창업 전까지는 메뉴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원칙은 ‘한국사람 입맛에 맞게’였다. 탄두리 치킨 자체는 인도 음식이지만 양념치킨맛 소스를 바르고 청양고추로 매운맛을 냈다. 일본 카레에 주로 얹어지는 돈가스나 닭튀김 같은 튀김 토핑 대신 떡갈비나 구운 오징어 등 한국식 토핑을 얹었다. 오픈 전 일주일간 인근 상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며 맛 품평회도 거쳤다.
사업 초반에는 서투른 일투성이였다. 손이 빠르지 않은 사장 둘이서 주문받고 조리하고 서빙하려니 실수도 많았다. 진동벨이 없어 카레를 들고 손님을 찾아다니는 적도 많았다. 김 대표는 “정신없이 메뉴가 나올 땐 손님이 먼저 알아보시고는 손을 들며 ‘여기요∼’라고 부르기도 했다. 불편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청년몰이니 좀 너그럽게 봐주시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개점 한 달 반을 넘어가고 있는 시나브로카레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처음엔 지인이나 시장 상인들이 대부분이던 손님들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보고 찾아오거나 재방문하는 손님들로 폭이 넓어졌다. 주말엔 일평균 매출 70만 원을 찍기도 했다. 김 대표는 “정말 싹싹 긁어먹은 그릇을 받아봤을 때, ‘너무 맛있었어요’라고 말해주고 가는 분을 만날 때 너무 행복하다”며 웃었다.
청년몰은 ‘경단녀(경력단절여성)’에게 다시 기회를 찾아주기도 했다. 푸드코트를 나와 널찍한 중앙 공간으로 들어서면 장예원 대표(32·여)의 ‘미나리빵집’ 간판이 보인다. 앞치마를 하고 나온 장 대표는 “청년대표들의 경력이나 나이가 다양하다. 저는 26세에 결혼해서 둘째까지 낳고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어 창업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게 많았고 그중 하나가 제빵을 배우는 거였다. 장 대표는 영동시장 건너편 공방에서 친할머니가 담그는 미나리 효소의 효모와 국내산 쌀가루를 이용해 빵을 만들었다. 빵 가게가 입소문을 타고 영동시장 청년몰에 입점하게 되면서 젊은층과 1, 2인 가구를 겨냥한 미나리크림과 다양한 콩을 넣은 미나리콩 쌀식빵을 개발했다. 장 대표는 “청년몰에 입점하게 돼 무엇보다 큰 용기가 됐던 건 바로 옆에 함께 시작한 장사 초보 청년 상인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냥 길가에 매장 하나를 냈다면 느끼지 못했을 동질감과 소속감이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웃 매장들과의 밀집성과 기존 상권과의 접근성에 힘을 받았다는 사례가 많았다. 핸드메이드 반려동물 용품을 파는 ‘스테이어라운드’의 문선경 대표(37·여)도 온라인몰에서만 판매를 하다 첫 오프라인 매장을 연 경우다. 문 대표는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시장이나 인근 푸드트럭 등과 맞물려 검색돼 찾아오시는 경우도 많다. 직접 손님들을 대면하며 상품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게 되니 사업 열의도 더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동시장 청년몰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은 모두 38명이다. 지원 자격은 만 19∼39세다. 포목 품목 위주인 영동시장은 원래 지역 어르신들이 한복 등을 맞추러 자주 찾던 곳이었다. 시장 구석 계단에서 이어진 2층은 작은 가게들이나 공방이 있다가 대부분 장사를 접고 나갔거나 버려진 공간이었다. 중소기업청과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경기도청, 수원시청이 합작해 7월 청년몰이 들어선 뒤 이곳은 평균 500∼600명, 주말에는 1000여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9월 현재까지도 청년몰은 이곳저곳 개선점을 찾고 자체적으로 보완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노후한 기존 시장 환기시설 공사가 이뤄졌다. 미로 같은 시장 내부 통로와 숨어있다시피 했던 2층 진입 계단을 눈에 띄게 꾸미고 알리는 것도 큰 작업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마지막 주에는 전체 입점 매장들이 회의를 연다. 매장별 휴무일이나 청소 순번, 푸드코트 테이블 정리 아르바이트 고용 여부 등 다양한 안건을 두고 청년들이 의견을 나눈다.
이훈 영동시장 청년몰 조성사업단 팀장은 “영동시장 청년몰은 다른 청년몰들과 달리 청년들이 부담해야 하는 사업비 10%를 시장 측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이젠 매출도 꾸준히 오르고 있고 시장 어르신들은 카레집, 젊은층은 파스타집과 문화체험공간을 찾는 등 다양한 방문객이 찾아오는 공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만 희망경영컨설팅 대표 “전통시장에 카레식당 입점 독특… 메뉴 늘려야”▼
수원 영동시장은 화성 팔달문에 근접해 위치하고 있는 전통시장이다. 지동시장, 미나리광시장, 못골종합시장 등 다수의 수원지역 전통시장과 인접해 있어 문화와 교통의 지역적 이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서 진행되는 ‘28청춘 청년몰’ 사업은 음식점과 문화 관련 아이템에 초점을 맞춰 영동시장의 업종 다변화와 시장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19일 영동시장을 찾은 이기만 희망경영컨설팅 대표(사진)가 ‘시나브로카레’와 ‘미나리빵집’ ‘스테이어라운드’ 등 청년몰 입점 매장을 직접 살펴보고 사업 발전 방안을 조언했다.
시나브로카레는 전통시장에서 흔치 않은 카레 메뉴 개발과 고용 창출에 대한 인식 등에서 청년 창업가로서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현재 매장 방문객들을 중심으로 판매하고 있어 고객 수를 일정 수준 이상 늘리기 어렵다는 점은 한계로 꼽혔다. 이 대표는 “포장, 배달 메뉴를 고민하되 상품의 양과 포장 편리성을 중점 요소로 고려하고, 점심 중심의 중저가 메뉴에 초점을 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현재 식사 중심 메뉴로 구성된 데 대해 “영업시간이 오후 9시까지인 만큼 퇴근 이후 맥주를 곁들일 수 있는 2, 3인용 메뉴 개발도 고려해볼 수 있겠다”고 덧붙였다.
미나리빵집은 인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미나리 소재로 특화해 다른 빵집과 차별화된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다만 점포 앞 매대에 구워낸 빵을 그대로 진열하고 있어 먹음직스럽긴 하지만 청결 인식이 낮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받았다. 쇼 케이스 등을 활용한 진열 방식과 미나리의 효능, 제조 과정의 특징 등을 스토리보드상에 홍보하는 방안 등이 추천됐다.
스테이어라운드의 경우 판매 아이템 측면에서 영동시장 특성과 접목한 사업이 추천됐다. 이 대표는 “전통시장과 함께하는 반려동물 사업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기대되는 바가 크다. 영동시장이 한복 특화 시장인 만큼 이를 애견용품과 접목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겠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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