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경영의 지혜]엄격한 규칙은 창의성의 함정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9일 03시 00분


고전주의 음악의 핵심은 ‘악보’다. 당대 음악가들은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악상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수단이 악보라고 생각했다. 악보를 음악의 ‘완전체’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고전주의 음악에서 화음의 규칙이 엄격하게 자리 잡았고, 박자의 정확성도 매우 중요해졌다.

역설적이게도 악보에 의존할수록 음악가들의 상상력은 점점 제한됐다. 악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19세기 서구 음악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비서구권의 음악들은 악보에 기록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즉흥적이면서 다양한 음악의 조화를 악보로 표현할 수 없었던 탓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음악에만 한정되지 않는 듯하다. 가령 건축 분야에서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된다. 현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도면’이다. 도면이 없으면 건물을 지을 수 없다. 건축 전문가들은 정밀하고 엄격하게 도면을 설계해 이를 토대로 건물을 올린다. 수학적 원리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건축물은 직선이나 원호 등 제한된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현대 건축 이전으로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상황이 좀 달라진다. 사실, 도면의 역사는 불과 150여 년으로 비교적 최신 건축 방식이다.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개 시공을 위한 구체적 도면 없이 비교적 자유로운 방식으로 건축했다. 즉, 설계도면에 구애받지 않지 않고 상상을 현실화했다. 오래된 건축물의 형태가 비교적 자유롭고 다양할 수 있는 배경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가 대표적 예다. 웅장한 돔 형태의 천장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러나 이 건축물을 어떻게 지었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브루넬레스키라는 당대 건축가가 도면 없이 지은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악보나 도면과 같이 각 분야에서 통용되는 ‘텍스트’를 고안해 내는 것은 분명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그 텍스트에만 의지하게 되면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이는 비단 건축이나 예술에만 해당되는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dbr#경영#고전주의 음악#악보#규칙#창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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