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6월 29일 동화은행을 포함한 퇴출 은행 5곳의 명단이 발표됐다. 동화 동남 대동 경기 충청은행이었다. 5개 은행 퇴출은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 지원을 해주면서 내건 조건이었다.
신한은행은 5곳 중 한 곳인 동화은행을 자산부채이전(P&A) 방식으로 인수했다. 부실 은행의 우량 자산과 부채만 인수하는 것이다. 고용 승계 의무는 없었다. 3개월간 명동성당에서 은행 퇴출을 반대하는 농성이 끝난 뒤 한솥밥을 먹던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동화은행 직원들은 이후 매년 6월 29일마다 모인다. 그들만의 ‘제삿날’이다. 모이는 사람은 점점 줄어 이제는 20∼30명 수준에 머문다. 퇴직자 중 잘 풀린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고된 삶을 살아왔다. 일부는 지병으로 죽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동화은행 퇴직자 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숨기고 싶은 민낯 그 자체였다.
19년 후 손에 쥔 건 빚뿐
퇴직 이후 김상훈(가명·52) 씨의 첫 직장은 지인의 소개를 받은 포장마차였다. 낮엔 장을 보고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3시까지 닭발과 곰장어, 조개구이를 팔았다.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요리를 배워가며 일을 익히길 6개월. ‘실업 광풍’ 속에 김 씨처럼 사정이 절실한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꿰차는 바람에 일을 그만뒀다. 이후 6년간은 심부름센터, 택배, 신문 배달을 전전했다. 2005년부터 법인택시를 운전했지만 2년 뒤 회사가 망했다. 입에 풀칠은 해야 하니 막노동을 했다. 벽돌과 나무를 나르고 가로수를 벴다. 하지만 한 달 만에 허리디스크가 왔다. 2008년부터는 보험설계사로 일하고 있다.
19년간 열심히 살았건만 수중에 남은 건 5000만 원의 빚뿐이다. 외환위기 전 선후배들에게 선 보증 1억 원이 고스란히 그에게 왔다. 19년간 나를 위한 대출은 한 푼도 받지 않고 남의 빚을 갚으며 살아왔지만 아직도 절반이 남은 것이다.
원청 죽으면 하청도 같이 죽는다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곧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동화은행을 나온 후 8년간 묵혀둔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최기영(가명·54) 씨는 2006년 발작성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지금도 가끔 이런 고통이 그를 찾아온다.
최 씨는 은행을 나온 뒤 학교 선배가 운영하는 조경회사로 옮겨 재무를 맡았다. 회사는 자주 돈이 부족했다. 그럴 때마다 최 씨는 자꾸 자기 돈을 집어넣었다. 이때부터 그는 공황장애를 앓았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회사가 어려워지자 아예 회사를 인수했다. 인수하자마자 원청회사인 풍림산업은 자기네 미분양 아파트를 사라고 강매했다. 사자마자 1억 원의 손해를 봤다. 2012년엔 매출의 90%를 차지하던 풍림산업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같이 망했다. 최 씨는 “직원들 다 내보내고 4개월은 매일 혼자 사무실에 출근해 멍하니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4년 전부터는 전국을 다니며 전기절감 기계를 팔고 있다. 월급은 없고 팔 때마다 수수료를 받는다. 하지만 이 일만으로는 집에 생활비도 주기 어려웠다. 지난해 5월부터는 1주에 3, 4일씩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삼수생 아들의 학원비는 아내가 대형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며 댄다.
최 씨에겐 총 2억 원의 빚이 있다. 그중 1억 원은 지인들에게 빌린 돈이다. 최 씨는 “사실 은행 빚 갚는 건 이미 포기했다. 날 믿어준 지인들에게 빌린 돈만은 꼭 갚겠다는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규직과의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계약직
이정우(가명·50) 씨는 동화은행 퇴직 후 19년간 직장을 7번 옮겼다. 그중 6번이 계약직이었다. 그리고 내내 정규직과의 차별 속에 살았다. 1998년 이 씨는 운 좋게 한국자산관리공사에 입사했다. 2년 뒤 과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정규직 과장은 연봉 4000만 원을 받는데 그는 3000만 원을 받았다. 적은 연봉을 불평하니 정규직 직원들은 “이미 전 회사(동화은행)에서 많이 받지 않았느냐”고 비아냥댔다. 이 씨는 “다른 직장으로 옮긴 뒤에는 노조에 가입할 수도 없었고 회의도 따로 했다. 승진에서 물 먹기도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위성환(가명·46) 씨도 외환위기 이후 직장을 9번 옮겼다. 한 곳에서는 회사가 영업정지를 맞아서, 다른 곳은 회사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가서, 또 다른 곳은 회사가 다른 회사에 인수되면서 그만뒀다. 바로 직전에 다녔던 한 저축은행에서는 권고사직을 통보받은 애 딸린 동료 팀장이 불쌍해서 “처자식 없는 내가 희생하자”면서 회사를 때려치웠다.
전병곤(가명·53) 씨가 동화은행에서 나온 뒤 할 수 있는 일은 자영업뿐이었다. 이듬해 KB국민은행 경력사원 채용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은행 퇴출 직후 채무불이행자가 돼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빠졌다. 처음엔 회사 선배와 무역업을 준비했지만 사기를 당해 시작도 못 하고 접었다. ‘떴다방’(이동식 중개업소)에서도 일했지만 월급은 거의 받지 못했다. 2001년 시작한 애견사업은 2003년 신용카드 대란으로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폐업해야만 했다. 현재는 단위 농협에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전 씨는 “인생의 황금기인 30, 40대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을 걷는 기분으로 살았다”며 긴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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